유원준의 문화/예술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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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노스텔지아, 포스트-디지털의 멋진 신세계

yoo8965 2016. 4. 13. 01:21


“이 멋진 새로운 세계여!”



   디지털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오늘은 약간 느낌이 다르다 어제 장만한 새로운 스마트 시계로 하루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다소 바쁜 날이 될 듯 하다. 벌써부터 상사의 메시지가 휴대폰에서 날 재촉한다. 아마도 해외 바이어에게 지난 밤 급한 메일이라도 온 것 같다. 시간이 아슬아슬하다. 회사로 가는 차 안에서 틈틈이 태블릿을 통해 오늘의 업무를 살펴본다. 실시간으로 가장 빠른 길을 안내해주는 네비게이션 덕에 늦지 않게 회사에 도착한 나는 드디어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한다. 네모난 스크린 속에서 회사 동료들과 쌓인 일들을 마주하는 것도 잠시, 난 어느새 화면 하단에 메신저 창들을 띄워놓고 친구들과 주말 약속을 잡고 있다. 점심은 인터넷을 통해 햄버거를 주문했다. 오후 업무를 생각하니 밖에 나갈 엄두가 안 난 까닭이다. 오후에도 바쁜 하루는 계속되었다. 옆 자리의 동료와는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메신저를 통해서만 대화를 했을 정도이니. 전 세계의 사람들과 이메일을 통해 업무를 처리하고 났더니 무언가 세계 여행이라도 다녀온 기분이다. 드디어 퇴근 시간이 되었군. 집으로 가는 길엔 오늘 잠깐 흘려들은 음악이라도 mp3로 들으며 가야겠다. 새로 산 스마트폰 시계의 배터리가 줄어드는 것을 보며 나의 멋진 하루도 끝나가고 있음을 느낀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템페스트 The Tempest>에서 주인공 미란다는 자신이 12년 동안이나 갇혀있던 섬을 떠나며 위와 같이 외친다.(“이 멋진 새로운 세계여!”) 그녀가 이제 마주할 문명 세계는 아직까지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멋지고 새로운 것들로 가득찰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채 말이다. 아마도 우리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처음 마주했던 그 순간의 기대와 희망 또한 미란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과거 우리가 살아왔던 삶의 로직과는 매우 다른, 무언가 빠르고 쾌적하며 편리한 새로운 기술에 관한 기대는 매우 강력했다. TV와 영화에서는 디지털이 그리는 신-세계에 관한 유토피아적 예견이 앞 다투어 그려지고 있었고 새로운 기술이 적용된 오브제들을 만날 때마다 기존 세계가 제공해주지 못한 신-기능에 경탄했다. 우리의 삶은 빠른 속도로 0과 1의 이진법 코드로 대체되었으며 디지털의 속성이 시대의 미덕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미란다가 새로운 문명 세계를 경험한 이후에도 그녀가 처음 외쳤던 ‘멋진 신세계’라는 표현을 계속 사용할 수 있었을까. 새로운 기술 문명들이 우리에게 과거와는 다른 편리함을 제공해주었지만, 그것에 도취된 우리들의 모습이 과연 멋진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을까.


멋지거나 멋지지 않거나. 디지털의 분절

   소설가 헉슬리(Aldous Huxley)는 미란다의 위의 외침을 인용해 1932년 자신의 소설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를 발표한다. 주지하다시피 이 소설은 우리의 미래를 회의적으로 묘사한, 기술-미디어의 의해 발전한 미래의 문명 사회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작품이다. 따라서 작품의 제목인 ‘멋진 신세계’ 역시 역설적 의미를 담고 있다. 소설 속의 미래는 감정까지 콘트롤되는 정밀하게 계산된 유토피아적 세계이지만, 결코 완벽히 통제되는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일 수 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디지털 기술은 분명 매우 멋진 경험을 선사해주고 있지만 그러한 경험들이 멋진 삶 자체를 약속하는 것은 아니며, 앞서 묘사한 일상의 장면처럼 결국 그러한 기술에 의존하며 자위하는 챗 바퀴 속의 다람쥐로 우리 스스로를 유비해버릴 수도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이쯤 되면, 디지털의 속성이 무엇이건데 이렇듯 우리 삶의 모습을 바꾸어가고 있는지 다시금 곰씹게 된다. 디지털은 이전법 코드로 구성되는 일련의 분절화이다. 모든 정보들을 0과 1의 성분으로 변환하여 체계화하기 때문에 이전의 정보 방식 및 존재 형태와는 다른 성격을 지닐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근본적 성격/성질 덕택에 디지털은 과거 아날로그와 구분되는 특성을 부여받는다. 많은 정보를 짧은 시간에 해석할 수 있으며, 그것을 다시 병렬적으로 재배치 할 수 있다. 또한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닌 것들 역시 0과 1의 체계로 귀속되므로 그들 사이의 자유로운 왕복이 가능해졌다. 우리의 미디어가 멀티미디어로 진화하는 근본적 요인이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디지털이 제공하는 기능적 요소들로부터 이전까지의 아날로그가 제공했던 따스한 감정을 전달받지는 못한다. 본질적 요소로부터 구분해보자면, 아날로그가 일련의 연속 및 닮음 구조로 상징되는 어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면, 디지털은 손가락으로 수를 세어보는 행위로부터 파생된 개념이다. ‘수’라는 분절적 단위는 디지털이 지닌 기본적인 의미 구조가 다분히 이성적 차이/구분에 의거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사실, 아날로그가 따스하고 디지털이 차갑다라는 느낌은 매우 추상적인 느낌일지 모르지만, 각각이 지닌 의미에 집중해보면 이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디지털이 체계화하는 대상이 아직까지 인공적인 무언가에 머물러 있다는 점 또한 디지털을 생경하게 느끼게 만드는 요소 중에 하나이다. 아직까지도 디지털은 우리의 신체와 자연을 완벽하게 체계화 하진 못하였다. 그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삶을 규정해오고 제한해오던 자연과 신체의 리듬감에 아직까지도 향수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아날로그의 탈을 쓴 ‘디지-로그(Digi-logue)’ 개념의 등장이 이러한 아날로그에 관한 향수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이다. 


Trialogue : 포스트-디지털의 재분지화

   위와 같은 그리움, 특정 향수의 대상으로서 아날로그를 상정하는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아날로그는 우리에게 이미 과거를 상징하는 시기적 의미로 규정된다. 사실, 아날로그란 단어 및 개념은 과거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져왔던 매우 기초적이고 자연스러운 개념이지만 그것이 일정 시기 이전의 대표적 개념으로 의미화 된 것은 역설적으로 디지털의 등장 이후이다. 지속적으로 존재해왔던 것들의 급작스러운 형질 변화를 목도하고 있자니, 당연하게도 변화 이전의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생길만도 하다. 그런데, 최근의 이러한 향수는 잃어버려 가는 것들에 관한 막연한 감성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조금은 다른 측면에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지나간 것을 기억하는 행위가 아닌, 앞으로 도래할 것들에 대한 기대로서의 향수이다. 미래에 다가올 것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문법상의 오류이겠지만, 철학적으로 보자면 우리에게 도래할 것들은 항상 과거의 어떤 것을 새롭게 현재화하며 탄생한다. 특히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이분법적 구도는 더 이상 우리에게 신선한 도식으로 치부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디지털을 넘어 포스트 디지털의 세계와 현상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사가인 로잘린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Reinventing the Medium’이란 글을 통해 포스트 미디엄 시대에서미디어들에 관한 재조명(재고안)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그는 펠릭스 가타리(Pierre-Felix Guattari)가 언급한 ‘포스트 미디엄(Post-Medium)’이란 용어를 계승하며 그러한 재조명이 앞으로의 새로운 미디어 환경을 또한 그와 융합된 새로운 예술적 상황이 전개될 것임을 예측했는데, 그에 따르면 사용자들의 개입을 허용하게 만드는 미디어의 사용으로부터 기술적 지지체로서의 미디어의 본성이 나타난다. 이러한 서술은 매체이론가인 맥루한(Marshall Mcluhan)의 영향력 있는 저서인 <미디어의 이해 Understanding Media>에서 ‘정세도(정보의 세밀도, Definition)’ 개념으로도 나타났다. 맥루한은 정보의 양이 많은 미디어를 핫 미디어(Hot Media)로 그 역의 경우를 쿨 미디어(Cool Media)로 구분하며 일반적으로 정보의 양이 많은 미디어를 우리에게 더욱 유용한 미디어로 인식했던 당시의 상황을 전복시켰다. <미디어의 이해>의 부재가 ‘인간의 확장(Extension of Man)’임을 떠올려보면 그의 주장이 보다 명확해진다. 이러한 도식을 현재의 상황에 적용해보면, 정보의 세밀도가 매우 높고 치밀한 디지털의 논리는 결국 아날로그가 가진 사용자의 개입 정도에 의해 보완될 수 있다. 최근의 포스트 디지털(미디어)에 관한 논의가 결국 그러한 사용자, 즉 인간 주체와의 융합을 통한 체화(embodyment) 개념으로 진화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주장은 프랑스의 철학자 질베르트 시몽동(Gilbert Simondon)의 논리와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몽동은 거대 기기화된 기계 문명에서 인간의 역할에 주목한다. 아무리 기계가 자동 기술화된다 하더라도 그러한 기계는 미결정의 여지를 지니기 때문에 중재자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약, 디지털이 그러한 개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여 분절시키는 기술이라면 아날로그는 자연과 유사한 그것의 닮음 구조를 전제한 연속적인 무언가이다. 이성을 바탕으로 기계적 도식을 지닌 디지털에서는 불가능한 포스트 디지털의 국면이 사용자와의 자연스러운 연속을 전제한 아날로그의 감성으로 완성될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의 ‘재분지화(re-articulation)’는 이러한 측면에서 시도되어야 한다. 디지털 기술의 특성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한계에 관한 연구는 현재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분절되어 있는 디지털 기술은 오히려 그것에 대응하는 아날로그적 감성과 결합할 때 새로운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다. 따라서 아날로그를 그리워하는 우리들의 감성은 다분히 미래를 향해 있다. 앞으로 도래할 무언가, 디지털을 넘어선 무언가를 쫓으며 우리는 아날로그라는 과거를 현재의 디지털 기술과 융합한다. 이것은 당분간 기업의 상업적 광고 마케팅 용어 속에서, 혹은 과학-기술을 주제로 한 다양한 학술 세미나의 지면에서 빈번하게 등장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마주하는 실제 환경에서도 감지할 수 있는 더 이상 특별한 무언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포스트 디지털은 새로운 수준에서 삼자대면을 하게 되며 결국 인간과의 유기적 통합으로 수렴될 것이기 때문이다.


퍼블릭아트 2015년 10월 기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