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준의 문화/예술 비평

열린 작품, 반응하는 환경 : 뉴미디어 환경에서의 예술과 놀이 본문

Articles

열린 작품, 반응하는 환경 : 뉴미디어 환경에서의 예술과 놀이

yoo8965 2014. 8. 16. 18:43



1. 놀이로서의 예술, 이미지

   미술사에서는 동굴 벽화를 인류가 그려낸 최초의 재현 이미지라고 설명한다. 단순한 의미에서 재현은 눈앞에 존재하지 않거나 스스로를 표현하지 못하는 실물을 표현하는 행위 혹은 대리하는 행위를 가리킨다.[각주:1]  고대인들은 동굴에 그들이 경험한 세상의 일부를 다시 존재하게 만들었다. 즉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서 그 대상을 다시 그들 눈앞에서 현전하게 만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동굴 벽화는 자연 세계에 관한 원초적인 모방 행위이며 일종의 환영(Illusion)이다. 일반적으로 초기 예술은 인간이 자연 세계에 남겨놓은 흔적으로부터 발생하였다고 이야기된다. 자신의 흔적을 외부에 남겨놓으려는 본능적 충동은 '손바닥 각인' 같은 흔적들을 남겨놓는데, 동굴 벽화 역시도 이러한 충동으로부터 발전된 자연에 대한 모사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사는 일종의 환영(illusion)을 만들어내는 기본적인 작용을 하게 된다. 네덜란드의 인류학자이자 문화사가인 호이징하는 문화의 여러 가지 현상을 놀이와 연결시켜 의미화하고 있는데, 그 중 이미지, 즉 일루젼을 만드는 근본적인 행위를 근원적 조형 욕구와 연결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주목해 볼 만하다. 일루젼(Illusion)이란 단어는 'il(=in)+lus(=play or shine)+ion(=suffix)'로 구성되어 있는데, 풀이해보자면 환영을 만드는 행위 자체에 놀이의 기능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호이징하는 이러한 환영을 만드는 놀이의 본질을 순수한 생리 현상이나 심리적인 반사 작용 이상의 것으로서 ‘본능(Instinct)’ 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정신(Mind)’이나 ‘의지(Will)’와도 다른 비물질적 성질의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인간이 행하는 놀이의 근거를 ‘형상화 작용(Verbildichung)’에 근거하는 현실의 이미지 전환 작업이라고 조건 짓고 있기 때문이다.[각주:2]

   호이징하가 놀이의 근거로서 현실의 이미지 전환 작업을 언급했다면 칸트(Immanuel Kant)는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를 지속시키는 예술의 가능성에 관하여 언급한다. 그는 유희를 미적 판단을 구성하게 하는 조화 안에서 능력들의 자유로운 행동으로 보았는데, 이는 예술의 근본적 발생 지점에서의 유희로서의 가능성, 즉 놀이성을 발견할 수 있게 만드는 단초가 된다.[각주:3]  또한 칸트 미학을 계승한 실러(Friedrich von Schiller)에 의하면 인간은 유희(Spiel)라고 부르는 본능적 충동을 통해 감각적인 것(감각충동)과 추상적 형식원리(형식충동)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매개하는 가상적 존재 상태가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즉, 감각에 의한 예술의 재현 행위는 놀이-유희 충동을 통해 형식적 외형을 갖추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술과 유희-놀이적 요소의 상관성은 인간이 지닌 본능적 단계 및 개념적 수준에서만 논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예술이 지닌 본격적인 유희적 요소를 분석하기 위한 근거로서는 충분치 않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예술은 완성된 작품의 형태로서 제작되었고 행위의 의미로서 간주되지 않았다. 따라서 개념적 수준에서 예술이 유희적 요소 및 놀이적 단계를 내포하고 있다 하더라도 예술은 그 자체로 놀이와는 구별되는 완성된 텍스트로 존재했다.



2. 예술 개념의 변화 

Lygia Clark, Diálogo de Óculos/Dialogue Googles, 1968


   마르쉘 뒤샹(Marcel Duchamp)에서 리지아 클락(Lygia Clark)의 작업에 이르기까지, 20세기의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놀이-유희성의 구조와 전략을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해왔다. 이러한 흐름은 모더니즘 시기의 예술이 지닌 형식주의적 관념들을 넘어 관객들과의 직접적 소통을 중시한 현대 예술의 전략이라 볼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현대 미술의 전개 상황을 살펴보면, ‘관객’과 ‘수용자’의 역할이 두드러지는 동시에 자기 완결성을 미덕으로 삼았던 예술 작품들이 완성된 텍스트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변화하는 다의적 존재로서 등장하였다. 움베르트 에코(Umberto Eco)는 자신의 저서 <열린 예술작품 Opera aperta>을 통해 개방성을 지닌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에 관하여 언급한다. 그는 과거로부터 예술 작품을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다는 의식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오늘날에 이르러서 현대 예술의 ‘개방성’은 예술의 복수성과 다수성, 다의미성 그리고 문학에 대한 해석과 반응에 의한 독자와 텍스트 간의 상호 작용이라는 관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획득한다고 주장한다. 예술은 더 이상 관조와 침잠을 통해서만 경험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흐름에서 보자면, 관객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완성되는 예술 작품이 놀이와 게임의 구조를 차용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상호작용(inter-act)에 관한 열망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점차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상호작용이란 것은 말 그대로 송신자와 수신자 상호 간에 이루어지는 일련의 작용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고대로부터 의사소통을 위한 직접적인 상호작용의 욕구에서부터 다양한 범위에서 주체와 타자 간의 쌍방향적인 작용을 추구하여 왔다. 예술의 역사 속에서도 이러한 흐름을 찾아볼 수 있는데, 원시벽화에서 프레스코와 사실적인 회화, 사진과 영화의 탄생, 텔레비전의 등장 그리고 디지털 미디어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미디어의 발전에는 일종의 인간의 욕구가 기여했다. 사각 스크린에 펼쳐지는 가상세계와의 상호작용을 실현시키려는 욕구인 셈인데, 대상에 관한 재현을 넘어 재현한 대상과의 상호간 작용을 꿈꾸어 온 것이다. 이러한 재현 대상과의 상호간 작용은 결국 재현 대상과의 보다 근본적인 통합을 꾀하게 된다. 여기에서 다시 예술 작품이 지닌 행위가 놀이와 연결되는 지점이 발견된다.[각주:4] 즉, 예술에 있어 유희적 상호작용성이 예술의 의미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그 자체가 존재 형태로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발달된 기술-미디어는 이러한 상호작용에 관한 욕구를 보다 직접적 형태로 가시화하였다. 과거 감성적 차원에서만 가능하던 상호작용은 기술 미디어를 통해 구체적으로 제시될 수 있는 요소가 되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이러한 상호작용성을 이전과는 다른 차원으로 증폭시켰다. 미디어 작가이자 이론가인 로이 애스콧(Roy Ascott)은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며, 예술의 변화된 모습에 관한 비전을 제시한다.


예술은 이제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정통적인 취미 기호와의 일방적인 만남도 아니며,

개인적인 해석에 의한 이차적 만남도 아니다. 그것은 관객이 창조적인 시스템에 통합된 일부가 될 수 있는,

변형과 상호작용성을 포함하는 제3의 긴밀한 만남인 것이다.[각주:5]


애스콧의 언급처럼 예술에서 상호작용성의 수용은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작품 수용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주로 감상의 대상이었던 예술 작품은 이제 그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만남을 기대해 볼 수 있는 새로운 환경으로 거듭나고 있다.


3. 기술과 결합한 예술, 그 유희적 특성

   호이징하는 예술을 하나의 창조적 놀이 차원에서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가 모든 예술 행위를 놀이로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조형 예술의 경우 놀이와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다고 언급하는데, 음악 예술과 비교하여 음악이 가지고 있는 놀이 특질이 조형 예술에는 결여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술은 물질적 형태의 제약에 묶여 있어 자유로운 놀이가 어렵고 음악이나 시처럼 생생하게 살아나기 위해 공적인 '행위'를 필요로 하지 않아 놀이 요소가 개입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각주:6] 이러한 언급을 기초로 예술 작품(특히 조형 예술작품)을 살펴보자. 호이징하의 언급처럼 조형 예술은 이전까지 분명 물질적 특성에 갇혀있었다. 조형 예술은 예술 전반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 분류 체계에 의한 것인데, 음악이나 문학, 연극, 무용 등 이른바 시간적 예술과 대비되는 것으로서 물질적 재료나 수단으로 호소되며, 직관 형식으로서의 시간과는 달리 공간 내에 성립하며 기반이 되는 가시적 공간이 시각을 주축으로 하는 점에서 시간 예술과 대비된다. 그러나 기술과 결합한 현재의 예술, 즉 매체 예술은 시간예술과 공간예술의 구분을 넘어 두 가지의 주요한 속성을 결합시켜 버린다.  매체 예술은 새로운 기술과 결합하여 시간과 공간이라는 속성을 매체를 통해 융합하여 제시할 수 있다. 따라서 호위징아가 언급한 물질적 형태의 제약에 묶여있는 점은 더 이상 조형예술이 지닌 놀이적 특성을 저해하는 요소가 될 수 없다. 또한 매체 예술은 음악과 시처럼 공적인 '행위'를 전제한다. 과거의 예술과는 달리 강력한 상호작용성과 직접적인 가상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Myron W. Krueger, Videoplace, 1972


   가상현실 개념을 처음으로 주창한 마이론 크루거(Myron W. Krueger)는 1969년 초반에 주위 환경의 방해를 받지 않으며, 몸 전체를 사용하여 움직일 수 있고, 여러 신체의 감각기관을 통해 컴퓨터의 동작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호작용을 하는 환경을 만들어냈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장소에 들어가서 다른 사람이나 그래픽상의 물체와 접할 수 있게 만든 <Videoplace>를 1972년 제작하였고. 이것을 그는 인공적 현실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작품은 실시간으로 비디오카메라에 포착된 관람객들의 이미지가 스크린 상에 그림자처럼 나타나는 작품이다. 관람객들은 컴퓨터 시스템과 다른 참여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오브젝트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다. 관람객들은 가상의 이미지 공간 속으로 진입하여 자신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들과 서로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환경을 유희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는 이러한 예술이 제공하는 새로운 환경에 대해 ‘반응하는 환경(The Responsive Environment)’이라 부르며 미래의 예술 형태를 예견하였다.[각주:7] 


   크루거 이후, 반응하는 환경으로서의 예술 작품은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1989년에 제작된 제프리 쇼(Jeffrey Shaw)의 <The Legible City>은 게임과 유사한 인터페이스로 관람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했다. ‘맨해튼’, ‘암스테르담’, ‘칼스루에’ 같은 도시를 모델로 제작된 가상의 도시 공간을 작품 앞에 마련된 실제 자전거를 타며 이동하게 되는데, 관람객들은 스스로의 작동에 의해 변화하는 가상 세계 속 환경을 경험하게 된다. 샤 데이비스(Char Davies)의 1995년작 <Osmose>는 보다 더 가상적인 사이버스페이스 속으로 관람객을 초청한다. 관람객은 HMD(Head Mounted Display)를 쓰고 가상 세계를 탐험하게 되는데, <The Legible City>가 실제 세계를 기반으로 제작된 작품이라면, <Osmose>는 현실 세계와는 구분되는 가상 세계 속으로의 여행을 제공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반면, 라파엘 로잘로 헤머(Rafael Lorzano Hammer)의 2001년작 <Body Movies>는 우리가 생활하는 현실 세계 속으로 작품의 상호작용적 환경을 침투시겼다. 이 작품은 빛에 의해 만들어지는 그림자의 원리를 이용하여 대중들이 보행하는 광장 공간에 설치되었는데, 관람객들은 자신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거대한 그림자와 이미지를 통해 유희적 상호 작용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예술 작품이 제공하는 즐거움은 사실 그리 낯선 경험은 아니다. 우리는 어릴 적 즐겨했던 게임으로부터 유사한 참여와 상호작용, 즐거움을 이미 경험해보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아트(Digital Art)>의 저자 크리스티안 폴(Christiane Paul)은 게임들이 현재 인터랙티브 예술 작품들에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많은 패러다임을 탐험하며 초기 디지털 아트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언급하며, 게임과 디지털 예술이 가지는 공통점을 언급한다.[각주:8] 그가 제시한 공통점은 첫째, 상호작용적(interactive)이라는 점, 둘째, 집단적이면서 참여가 가능한(collaborative and participatory) 점, 셋째, 놀이(Role-playing)란 점, 마지막으로 많은 다른 디지털 기술들과의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 등인데, 이러한 공통점들은 서로 밀접한 영향 관계를 지니며 현재의 디지털 예술 작품에 영향을 주고 있다.



Rafael Lorzano Hammer, Body Movies, 2001



4. 마치며
  
   료타르(Jean-François Lyotard)는 1979년 발표한 그의 저서 <포스트 모던의 조건>에서 스스로 작동하고 이야기하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급격히 변화시키는 새로운 물질(New Materials)에 관하여 언급한다. 만약, 현재의 예술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디지털 테크놀로지 및 새로운 매체 환경이 이러한 새로운 물질로서 기능한다면, 과거로부터 예술이 고민해왔던 지점들, 즉 주체와 타자간의 문제 및 세계와의 관계성 등에 있어서 보다 직접적인 해법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예술 자체가 열린 작품으로서 스스로 작동되며 관객과의 관계를 구성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술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우려되는 지점은 앞서 언급한 반응하는 환경으로서 나타나는 예술 작품과 유희적 특성들이 매우 표피적인 형태로만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매체 연구자인 레프 마노비치(Lev Manovich)는 보이는 순서가 고정되어 있는 과거의 매체와는 대조적으로 새로운 매체는 객체와 상호작용할 수 있으며, 이러한 특성은 사용자가 자신의 고유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공동 작가가 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한다고 주장한다.[각주:9] 그러나 최근의 현대 예술 및 매체 예술의 흐름을 관찰해보면 이러한 적극적인 움직임을 찾아보기 어렵다. 상호작용적 관계 속에서 찾아지는 유희적 속성은 작품 그 자체의 목적과 의미를 구성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예술 작품들, 그리고 다수의 관객들은 현대 예술의 복잡성에서 탈피하여 즉각적인 이해와 경험을 요구한다. 예술 작품은 이미 반응하는 환경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가 찾아야 하는 예술 작품의 의미는 역설적으로 즉각적인 유희성을 넘어 우리 스스로의 사유를 더욱 강화시킬 때 가능하다. 예술 작품이 제공하는 유희적 속성과 관객의 사고의 과정이 통합될 때, 결국 열린 예술 작품의 의미에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월간 미술세계 2014년 5월호 기고글.



  1. 재현 (representation)이란 라틴어 어원인 'repraesentatio', 즉 '다시(re) 현전케하는 것(praesentatio)'을 의미하고, 독일어의 'Vorstellung', 즉 '앞에(vor) 세우는 것(stellung)'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2. 요한 하위징아, 김윤수 역, 『호모루덴스』, 까치글방, 1993, pp. 9-10 참조. [본문으로]
  3. 임마누엘 칸트, 김상현 역, 『판단력 비판』, 책세상, 2011, pp. 72-78 참조. [본문으로]
  4. 가다머(Hans Georg Gadamer)에 의하면 예술의 경험이라는 맥락에서 놀이가 뜻하는 것은 창작자나 향유자의 태도나 마음 상태, 놀이 속에서 활동하는 주관성의 자유가 아닌 예술 작품 자체의 존재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즉, 그는 예술 작품과 놀이를 각각 주체와 객체로 분리하는 것이 아닌 존재 방식으로서 설명하며 이를 통해 주체와 객체가 통합될 수 있다고 보았다. 가다머는 예술 작품과 놀이를 주체와 객체 개념으로 분리시킨 칸트와 실러의 견해를 부정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 임홍배 역, 『진리와 방법: 철학적 해석학의 기본 특징들』, 문학동네, 2012, pp. 151-153 참조. [본문으로]
  5. 로이 애스콧, 이원곤 역, “제 3의 미술관”, 『테크노에틱 아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2, p. 143. [본문으로]
  6. 하위징아는 의례, 예술, 놀이 사이의 어원적 연결이 그리스 단어 아갈마(αγαλμα ,agalma)에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같은 책, pp. 314-318 참조. [본문으로]
  7. 마이론 크루거는 미래의 예술형태를 예견하며 인간과 기계 사이의 실시간 상호작용에 기반을 둔 새로운 미적 매체를 위한 토대로서 ‘반응하는 환경’을 제안하여 왔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을 참조하기 바람: 랜들 패커, 켄 조던, 아트센터 나비 역, 『멀티미디어: 바그너에서 가상현실까지』, 나비프레스, 2004, pp. 203-204. [본문으로]
  8. 크리스타안 폴, 조충연 역, 『디지털 아트』, 시공아트, pp. 196 -198 참조. [본문으로]
  9. 레프 마노비치, 서정식 역, 『뉴미디어의 언어』, 생각의나무, 2004, p. 102.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