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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준의 문화/예술 비평
가상예술의 이해 : 환영, 몰입 그리고 거짓현실 본문
0. 가상의 개념
'환상진동 (幻想振動) 증후군(Phantom Vibration Syndrome)'이란 것이 있다. 주로
바쁜 현대인들에게 습관적으로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인데, 설명하자면 전화가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휴대폰 진동벨이 울린다고 지각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이 증후군은 과도하게 기술 매개된 우리의 환경에서
종종 발생한다. 분석해보자면 '진동'은 실재하지 않지만 진동을 느끼는 '감각현상'은 실재하는 셈인데, 미디어에 둘러쌓여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떠올려보면
이러한 현대병?도 나타날 법한 상황이다. 과학 기술과 결합한
새로운 기술-미디어는 우리의 생활 속에 깊숙히 침투하여 갈수록 그 의존도를 높여가게 만들고 있으며, 이미 현대인들의 대부분은 컴퓨터와 휴대폰이 없는 삶은 생각하기도 힘들 정도로 심각한 미디어 의존증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과거엔 상상하기 힘든 환상적인 그러나 가상적인 현실 또한 만들어낸다. 휴대폰을 통해 멀리 떨어진 가족들과 얼굴을 마주하며 화상 통화를 한다던지, 실시간으로
컴퓨터를 통해 직장이 아닌 집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상황들 말이다. 더 이상 '가상현실'은 SF 영화
속에만 등장하는 환상적 장면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일종의 실재하는 현실이다.
<알타미라 동굴벽화>, 1879년 에스파냐의 북부 알타미라 동굴에서 발견, 구석기 후기 벽화
우리는 일반적으로 '가상(假象, Schein, Virtual)'이라는 형용사를 실재하지 않는 무엇 혹은 특정 상황 등을 설명할 때 사용하거나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재현해보는 '모의실험(Simulation)'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상 개념의 일상적 활용은 현실과의 일정 거리를 전제하고 있다. 즉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미래에 일어날 수 있으며 실재하지 않는 무언가'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러나 가상의 개념은 현실과 대비되는 것이 아니다.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는 가상적이라는 말을 '아직 현실이 되지 않은 그러나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레비(Pierre Levy) 또한 이러한 차원에서 가상의 개념을 현실의 잠재태 개념으로 이해하는데,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가상의 의미가 곧 현실의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상현실(VR : Virtual Reality)' 이라는 합성어는 이와같은 가상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든다. '가상현실'은 '가상'과 '현실(Reality)'이라는 두 개의 단어로 조립된 단어이다. '가상'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으로 보자면, '가상현실'이란 말은 그 자체로 모순된 현실적 상황을 반영한다. 따라서 앞의 언급처럼 이미 현실로서 받아들여지는 우리의 '가상적 현실'은 '가상현실'이 허구가 아니라 우리에게 실재하는 현실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다시금 인식하게 만든다.
1. 가상과 환영
그렇다면 왜 우리는 가상과 예술을 결합시켜 '가상예술'을
이야기하는가? 예술과 가상의 개념은 어떠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현재의 상황에서 생각해보면 가상성을 떠올릴 때 예술보다는 새로운 기술적 상황이 먼저 떠오른다. 기술은
우리 생활의 여러 부분들을 가상화시켰다. 과거로부터 무수히 많은 기술적 도구들이 우리의 자연적 요소들을
인공적인 환경으로 변화시켰으며, 그러한 변화에 의해 가상적 상황은 때로는 현실로 때로는 더 큰 가상으로
이어졌다. 18세기 중엽 증기기관(차)의 발명은 과거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아니 꿈에서만 가능했던 시간과
공간의 압축을 가능케했다. 당시 사람들의 가상적 거리와 시간의 개념이 새로운 기술에 의해 현실화되었던
순간이었다. 사실, 이와같은 사례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만 하는 사항은 기술이 기능적 가상화 이외에도 예술적 가상화를 실현시켰다는 사실이다.
<비밀별장Mysterienvilla>, 폼페이 , 벽의 각면의 프레스코화로 장식, B.C 60년경
예술에 있어서 가상의 문제는 결국 가장 근본적인 이미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예술은 그 기원으로부터 자연과 인간의 형상을 모방했던 하나의 '상(Image)'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술사 공부를 시작할 때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동굴벽화도, 고대인들의 주술 활동에 사용되던 행위들도 일종의 이미지이자 환영(Illusion)이다. 이러한 환영은 현실적인 것의 가상 이미지로서 상상의 영역으로부터 평면 이미지로 재현되었다. 재현된 이미지는 보는 이들에게 실재하는 것들에 관한 가상적 차원의 감상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2차원 평면에서 보다 높은 차원의 '현실같은' 이미지가 요구되기 시작했다.
<폼페이벽화> , 원근법의 초기형태가 발견되는 벽화
현실같은 몰입감을 제공하기 위한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졌는데, 이미지로 둘러쌓인 환경을 만들거나 이미지 속에서 현실 같은 3차원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고대 로마의 폼페이 벽화는 이러한 두 가지의 방법을 모두 보여주었는데, <비밀별장Mysterienvilla>이라 이름붙은 5번째 방의 작품은 사방의 온 벽을 29명의 인물화로 덮고 있다. 때문에 이 방에 들어선 이들은 화면 속의 인물들에 둘러쌓여 일종의 사건 속으로 진입한 느낌을 받게 된다. 폼페이 벽화는 이러한 일종의 이미지에 의한 가상 환경 만을 선보인 것이 아니라, 건축과 풍경에 관한 원근법적 시각이 담겨있는 이미지 또한 제작하였다. 원근법은 라틴어 '아르스 페르스펙티바 (ars perspectiva)' 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는데, 3차원의 현실을 2차원의 평면에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회화를 비롯한 건축, 정원, 도시계획 및 무대장치 등의 시각적 효과로서도 주로 사용되었다.
2. 기술적 환영의 전개
에드가 드가(Edga Degas), <계단을 오르는 발레리나들>, oil painting, 1886~1888
원근법은 시각 예술의 역사에 있어서 사진이 발명되기 전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강력한 회화적 일루젼을 구현하기 위한 절대적 방법이었다. 그러나 사진기가 발명되고 난 후, 인상주의나 입체파 등은 과거의 눈에 보이는 대로 재현했던 회화의 역사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사진이 기존 회화가 지녔던 강력한 현실 재현성을 대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화는 사진기의 기능적인 면을 뛰어넘는 인간의 중요한 감각과 지각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이는 가상성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을 해보자면, 환영적 이미지에 있어서 '시각성' 이외에 다른 감각, 이를 테면 감각이나 지각 등의 다른 감각 요소들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인상주의는 사물이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 자체를 묘사하려 하지 않고, 당시에 느껴지는 감각 자체를 중시하였고, 오히려 사진기가 보여주었던 구도를 역으로 받아들여 화폭에 담기도 했다.
데이비드 브루스터(David Brewster), <입체경 Stereoscope>, 1849
브루스터는 휘트스톤 입체경의 거울을 렌즈로 교체하여 입체경을 설계하였다.
사진기는 광학적으로 분석해 볼 때, 인간의 눈에 의한 시각적 매커니즘을 기계적으로 구현한 것이었다. 이러한 발명은 당시 인간의 눈이 가진 여러가지 특성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었기 때문인데, 사진기의 발명 이전에 이미지를 입체로 보려는 시도들도 진행되고 있었다. 영국의 발명가이자 물리학자인 휘트스톤(Charles Wheatstone)은 인간이 대상물을 바라볼 때 두 눈이 서로 다른 각각의 시각 정보를 받아들인다는 사실(기원전 300년경 그리스의 수학자 유클리드에 의해 밝혀짐)을 두 개의 거울을 사용한 '입체경(Stereoscope)'으로 1833년 구현하였다. 입체경은 이후 거울을 렌즈로 교체하여 현재와 같은 형태의 사진기의 형태로 개발되기에 이르렀는데, 1853년 영국 사진가 라티머 클라크(Latimer Claik)는 슬라이딩 홀더 판을 이용하여 카메라가 좌, 우로 움직이며 입체 사진을 연속으로 촬영할 수 있는 장치를 최초로 개발했으며, 1854년 영국의 스펜서(Spencer)는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고 렌즈만 좌,우 방향으로 사람의 두 눈이 떨어진 거리와 같은 6.5cm를 이동하며 두 장의 사진을 찍어, 입체감을 표현하는 입체 카메라를 개발하였다. 이러한 시도들은 이미지를 이용한 가상적 환영 효과에 대한 실험들이 2차원 평면 이미지를 넘어 보다 몰입적인 환경을 제공하는 3차원 입체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한 시도로서 진화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3. 이미지 공간으로서의 파노라마
고굉중, <한희재야연도> 부분도, 비단에 채색, 송나라, 12세기
가상적 이미지를 구현하는 또 다른 방법은 앞서 소개한 폼페이의 벽화처럼 이미지로 둘러쌓인 공간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도는 고대에서부터 계속 시도되었는데 이미지의 넓이를 확대하여 보다 많은 이미지를 한번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동양에서도 하나의 장면이 아닌, 이야기의 흐름을 알 수 있게 만드는 가로로 넓은 회화가 시도되었으며, 르네상스 시기의 회화에서도 삼면화와 같은 화폭을 확대하여 관람객들을 보다 몰입적인 환경으로 유도하려는 시도가 있어왔다. 이러한 시도들은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돔 형태의 건축물의 천장회화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19세기에는 다양한 건축물의 형태 속에서 이러한 파노라마 식의 이미지 공간을 살펴볼 수 있다. 거대한 이미지의 구현은 보다 몰입적인 환경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이미지의 가상성을 확대하였다.
Section of the Rotunda, Leicester Square, Burford's Panorama, 1801
그러나 파노라마 이미지의 영향력이 확대된 것은 사진 이후 등장한 영화의 스크린의 개념과 결합되면서 부터이다. 사진은 기존 이미지가 가지고 있던 원근법적 질서를 파괴하기도 했지만, 새로운 질서를 구현하기 위한 시금석 역할 또한 수행하였다. 낱장의 이미지로 구현된 사진은 여러 장의 이미지로 구성된 영화로 발전하였고, 영화는 과거의 이미지로 환경 전체를 구성하는 총체적 이미지를 통한 가상현실을 보다 현실적으로 구현하였다. 1939년에 개최된 World's Fair에서 공개된 '시네라마(Cinerama)'는 1952년에 크기를 비약적으로 키우고 180도에 달하는 각도로 관객들을 둘러싼 스크린을 제시하며 상업적으로 상연되었는데, 시네라마는 기존 하나의 영사기로 평면 스크린에 이미지를 투영시켰던 방식에서 탈피하여 세 개의 영사기와 가로로 넓게 펼쳐진 반원형의 스크린을 통해 구현되었다. 매체 이론가인 올리버 그라우(Oliver Grau)는 이러한 시도로부터 가상현실의 특성을 이미지 공간에 총체성을 부여하여 시야를 완전히 채우는 인공세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설명하는데, 시네라마의 경우 관객의 시야를 완전히 채우는 스크린을 통해 스크린 속의 가상적 세계는 마치 현실과 같은 실재감을 제공했고, 관객들은 온전히 스크린에 몰입하여 가상적 이미지가 그려내는 세계 속에 빠져들 수 있었다.
4. 디지털 가상현실, 사이버스페이스
지금까지 이미지를 중점으로 예술에 있어서 가상의 개념이 매우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 그리고 이후의 전개 과정에서 기술이 개입하여 새로운 가상 이미지의 세계가 열리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앞서 언급했던 이미지를 본질적인 부분에서부터 변화시켰다. 이미지가 태초부터 자체적으로 발생할 수 없는 주체에 종속된 것이었다면, 디지털 이미지는 가상적인 존재 기반을 갖기 때문에 현실적 제약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한다. 즉, 디지털 이미지는 근본적으로 '어떤 것'에 관한 이미지가 아니다. 때문에 어떠한 것의 모사, 즉 모방 이미지가 아닐 수 있다. 가상 이미지는 근본적으로 현실의 어떠한 것을 대체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디지털 이미지는 이러한 공식에서 탈피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 이미지로 만들어진 가상 세계는 현실과의 관계 설정이 필요없다.
샤 데이비스(Char Davies), <Osmose>, 1995
샤 데이비스(Char Davies)의 1995년 작품 <Osmose>는 현실과의 연관성이 전제되지 않은 가상 예술의 가능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관람객들은 입체감을 주는 HMD(Head Mounted Display)와 자신의 호흡과 움직임을 탐지하는 실시간 모션 감지기를 착용하고 작가가 만들어놓은 가상공간으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Osmose>는 자연을 상징으로 만들어진 12개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관람객들은 자신의 의지로 사이버 공간 속을 유영하며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이 작품에서도 자연과 인간의 행동 패턴 등의 모티브는 존재한다. 그러나 다른 가상현실 체험 기구 및 프로그램과는 다르게 현실과 대비되는 경험을 중시하기 때문에, 현실같은 느낌을 재현하기 보다는 이질적인 풍경 속 익숙한 신체의 경험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앞서 1989년에 제작된 제프리 쇼(Jeffrey Shaw)의 <The Legible City>에서도 나타나는데, 관람객들은 이 작품에서 ‘맨해튼’, ‘암스테르담’, ‘칼스루에’ 같은 도시를 모델로 제작된 가상의 도시 공간을 작품 앞에 마련된 실제 자전거를 타며 이동하게 된다. 실제 도시를 모델로 하였지만 그 모습은 텍스트화 되어 문자로 상징화된 우리의 문명을 시사한다. 랄프 슈넬(Ralf Schnell)은 이 작품을 설명하며, 이러한 예술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 예술의 개념 확장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슈넬은 기존 예술이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 공간 개념이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언급한 것인데, 1984년 미국의 과학소설 작가인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이 만들어낸 '사이버공간' 즉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 같은 용어는 이러한 디지털 이미지와 공간의 개념을 적절하게 설명한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인공두뇌(Cybernetics)'과 '공간(Space)'의 합성어인데,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사용한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새로운 이미지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도비 디지털 뮤지엄Adobe Museum of Digital Media (AMDM)>의 스크린 샷, 2010
최근 디지털 이미지 기술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있다. 과거 시각 예술이 제공한 이미지를 통해 환영과 같은 가상 세계 속으로 빠져들었다면, 현재에는 현실과는 다르지만 실재하는 이미지 공간, 즉 사이버스페이스가 존재한다. 가상과 관련된 기술은 이제 예술의 범위를 넘어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요소들에 스며들고 있다. 예술은 게임과 같은 상호작용적인 가상적 이미지를 통해 나타나고, 현실은 물질적 세계에 속한 층위와 디지털 이미지로 만들어진 비물질적 시계로 이분화된다. 최근 등장하는 SNS 및 모바일 기술, 구체적으로는 사이버건축, 증강현실게임(ARG) 등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점차 디지털로 구성된 가상 세계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사례들이다. 따라서 현재의 예술 작품은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반영한다. 다만, 과거 예술이 사람들에게 현실을 모사한 가상적 이미지로 환상과 같은 세계를 꿈꾸게 하였다면, 현재의 그리고 앞으로의 예술은 이미 가상화된 우리의 환경을 현실 세계와 조화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반성적 기술로서 기능할 것이다.
참고문헌
Ian Bogost, <Unit Operations, An Apporach to Videogame Criticism>, MIT Press, 2006
Oliver Grau, <Virtual Art>, MIT Press, 2003
랄프슈넬, 강호진 외 역, 『미디어미학』, 2005, 이론과실천
제이 데이비드 볼터 & 리차드 그루신, 이재현 역, 『재매개 : 뉴 미디어의 계보학』, 2006
박영욱, <매체, 매체예술 그리고 철학>, 도서출판 향연, 2008
볼프강 벨슈, 심혜련 역, <미학의 경계를 넘어>, 향연,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