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준의 문화/예술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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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장르 공공예술로서의 미디어아트, 그리고 네마프

yoo8965 2011. 8. 21. 03:04


0. 대안영상문화의 , 서울뉴미디어페스티벌

우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입버릇처럼영상세대라는 말로 그들의 정체성을 함축해서 표현하곤 . 이러한 용어로서 그들을 지칭한 까닭은 과거 텍스트에 기반한 미디어를 넘어 영상 미디어에 자유롭게 접근하고, 또한 창작할 있는 시대적-기술적 요건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그들은 정말 영상세대로서 기능하고 또한 유희하고 있는가? 다소 광범위한 질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위의 용어들이 겉만 번지르르한 마케팅적 의미로서만 이해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볼 일이다. 물론 소비의 양상으로 보자면 분명 넘쳐나는 영상물이 유통되고 있기에, 그러한 해석들이 사실상 어느정도는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상을 만드는 작가들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이러한 세태는 아직까지 활성화된 영상 창작의 세대로서의 그들을 인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대안영상문화축제로 위치한 네마프가 집중하고자 지점은 바로 이러한 지점이다. 매스미디어와 대중영화를 통해 우리는 획일적인 영상 문화의 관습을 스스로 만들어버렸다. 따라서 가능성 있는 새로운 영상 문화를 발전시켜나가기 전에 오히려 획일적인 채널로서의 영상을 전제하고 또한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TV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영상 문화의 가능성을 접하고 있지만, 그러한 가능성은 여전히 가능성으로만 머물고 있다. 네마프는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 곳곳에서 개최되는, 소위 말해 뉴미디어 페스티벌이라고 불리우는 여타의 행사들과는 달리 뉴미디어가 지닌 형식적인 혁신성과 실험성이 아닌, 차별성 있는 콘텐츠의 실험성 자체를 보여주려고 시도하였다.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의 네마프의 시도들이 더욱 유의미한 까닭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스스로 증식하고 확산하여 한국 대안영상문화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점일 것이다.

 

1. 탈 장르화된 미디어아트


    흔히들, 예술가는 시대의 통념과 절연(絶緣)하여 '정신의 내적 필연성'에 따름으로써 다음 시대를 창조해낸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반문해보자. 시대를 반영하지 않는 예술이, 또한 예술가가 다음 시대를 창조할 수 있을까? 그리고 시대의 통념을 전제하지 않는 예술이 그 사회를 온전하게 반영하는 거울이 될 수 있을까? 현 시대는 명백히 과학 기술에 의해 촉발된 신-매체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그것도 예술의 원본성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던 광학적 복제 시대를 넘어 전자적-디지털적 복제와 가상 이미지의 시대이다. 빌렘 플루서는 디지털 코드로서 탄생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새로운 공간 및 시간 경험이다. 그것은 새로운 패러다임과 마찬가지로- 모든 종래의 경험들을 부정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과거로부터 새로운 기술이 나타날 때마다 세상은 변화해 왔다. 철도는 기존 시-공간에 관한 인식을 바꾸어버렸고, 사진은 복제의 기능으로부터 예술이 지닌 원본성과 아우라의 개념을 소급시켰다. 자연스럽게 각 시대의 예술도 그와 동기화된 감성과 행위를 발생시켰는데, 큐비즘은 사진 기술에 조응하여 사실적 회화공간을 파괴하고 대상을 파편화시켰으며, 비디오아트는 미술의 시간적-공간적 한계를 광활하게 터놓았다. 특히 플루서의 언급처럼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종전의 예술 개념들을 근본적 차원에서 변화시키고 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이러한 물질적 형태를 디지털로 구성된 가상의 숫자 정보로 환원시켰으며 예술은 더 이상 물리적 환경 속에서만 구현되고 기능하는 현실적 개념에서 비물질적이며 가상적 상황 속에서도 발현되는 그 무엇이 되어가고 있다. 만약 미디어아트가 기존 예술과는 다른 탈 장르적 성격을 보여줄 수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특성 때문일 것이다. 미디어아트는 기존 예술이 고수했던 각기 다른 장르의 특성을 숫자 정보로 치환하여 혼합-제시할 수 있으며, 하나의 결과물로 귀결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미디어를 통한 장르의 혼합은 이전 예술이 보여주지 못했던 다-감각적 예술 작업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1900년대 이후의 아방가르드에게 있어 예술과 과학 기술의 관계는 그 위상과 비중을 달리하며 항상 문제의 중심 주변에 머물러 왔다. 들뢰즈는 새로운 사유와 개념이 창출되기 위해서는 상상력 혹은 감성이 개념에 종속되어서는 안된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예술이 취한 전략들을 살펴보면 스스로의 개념 종속을 피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미디어들을 적절히 사용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새로운 기술들은 예술의 면모를 지속적으로 변화시켜 왔으며, 어떠한 측면에서는 가장 순수한 사유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에 설치와 퍼포먼스를 동반한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업에 TV 모니터나 비디오와 같은 새로운 기술-미디어를 사용하였으며,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컴퓨터가 활용되기에 이르렀다. 최근에 와서는 예술의 모든 장르에서 기술-미디어와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으며, 이러한 기술과의 결합에 힘입어 예술 장르들간의 자유로운 왕래가 시도되고 있다. 마셜 맥루한은 인간의 감각들이 분배되는 비율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의 예언처럼 현재의 기술-미디어 및 그와 결합된 예술은 메시지보다는 서로의 교류에 의해 만들어진 혼성 감각의 전달을 더욱 중시하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과 기술-미디어와의 결합이 아방가르드 정신이 왜곡된 채 형식적인 실험으로 물화되는 이유는 기술-매체를 예술의 대립항으로 위치시키는 일종의 오래된 관습 때문이다. 모더니즘 시기에는 이러한 기술 매체의 전면화 (당시에는 좀 더 형식주의적 측면에서 두드러졌지만)에 관하여 ‘심미주의’와 ‘기술주의’로 나뉘어 각각 테크놀로지의 심미화와 예술의 테크놀로지화를 부추겼는데, 이러한 관점들은 예술을 바라보는 두 가지의 주요한 시선, 즉 감성과 이성의 측면으로도 확대되어 이해되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는 현 시대의 예술을 바라보는 데 있어 그리 유용하지 못하다. 최근 예술과 결합된 기술-미디어는 과거처럼 이성적 측면에서 바라보기엔 매우 감성적이고 혼성적이기 때문이다.

 

2. 한국의 미디어아트 흐름, 그리고 변화의 필요성


   이제 한국의 미디어아트를 살펴보자. 한국의 경우, 미디어아트 씬?에서 주목받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한국의 발전된 IT 기술 및 모바일 문화 때문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국가이며(Akamai, 2011 7월 보도),  스마트폰 트래픽 사용량 또한 세계 1위이다(Informa Telecoms&Media, 2010 11월 보도). 이러한 환경은 전 세계적으로 한국을 새로운 미디어 문화 예술의 요충지로서 주목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두 번째 이유는 백남준이라는 불세출의 아티스트 때문이다. 1960년대부터 포터블 비디오 기기 및 TV-인공위성 등을 사용하여 예술 작업을 진행해온 백남준은 전 세계적으로 비디오(미디어) 아트의 창시자로서 인식되고 있다. 덕분에 한국은 포스트 백남준이 기대되는 미디어아트적 잠재력을 지닌 국가로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젊은 미디어-사용자들이 밀집되어 있는 서울의 경우, 누구나 자유롭게 모바일 기기를 이용하여 새로운 미디어-영상 문화를 손쉽게 접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미디어아트 현황을 살펴보면 그러한 장미빛 전망과 기대 그리고 미디어 문화의 발전이 무색할만큼 다양하게 전개되지 못하고 있으며 예술계에서의 평가 또한 인색하기 그지없다. 과거 예술은 순수한 형태의 감상을 필요로 하는 어떤 것이었으며, 그 이후 해독되어야 할 특정한 무엇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현재의 예술은 그러한 두 가지의 감상 태도에 더하여 공감각적 체험을 전제하는 유희적인 그 무엇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국내의 상황을 살펴보자면 이러한 변화하는 예술 개념의 도입에는 적극적이지 못하다. 또한 미디어아트라는 장르 내에서도 편중된 수용과 전개를 확인할 수 있는데, 다양한 감각을 유발하는 과학-기술과 연결되는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시각 중심의 작품들만이 나타나고 있다.

   또 다른 문제점은 국내의 상황에서 미디어아트가 예술 작품으로서 판매가 되기 힘든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예술은 자본주의 사회 체제 안에서 재화적 가치로서 평가된다. 그러나 미디어아트의 경우, 원본의 개념 자체에서부터 기존 예술과 다르기 때문에 원본성이 전제된 물질적 개념이 중시되는 예술-시장에서는 취급되기가 어렵다. 동시대의 가장 앞선 예술의 모습을 선보이는 세계 유슈의 비엔날레 및 미술관의 전시들이 개념적인 미디어 예술 작품들을 앞다투어 선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아트가 예술-시장에서는 아직도 낯설고 생경한 존재 취급을 받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까닭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점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급속하게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및 예술 환경을 지니고 있는 국내의 상황을 떠올려볼때, 아직까지도 전통적인 예술 작품에게 요구되는 소통의 방식들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까운 부분이다. 미디어아트는 분명 작가들의 형식적-내용적 실험과 장르간의 혼합적 시도를 통해 다양하게 전개되어야 하겠지만, 그러한 시도를 뒷받침해주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열린 자세와 새로운 예술 유통(소통) 시스템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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