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준의 문화/예술 비평

김웅현 / 해석이 사건이 될 때 : 그들이 거주하게 될 세계는 어디인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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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현 / 해석이 사건이 될 때 : 그들이 거주하게 될 세계는 어디인가?

yoo8965 2015. 11. 14. 19:00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는 이미 직접 체험의 세계를 넘어 매체에 의한 간접 경험과 그것으로부터 야기된 가상의 정보 덩어리들에 대한 해석 문제로 점철되고 있다. TV의 뉴스 속에서는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고 그들로부터 야기된 사건에 대한 보도들로 넘쳐나며, 인터넷을 통해 현실에서 만난 적도 없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자신이 보여주는 스스로의 이미지는 실제의 본 모습이 아니며, 타인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미 이러한 사실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당면한 전제가 되어버렸다. 다만, 이렇듯 부유하는 흐름 속에서 모든 것은 가벼워진다. 그리고 이 가벼운 정보들이 우리의 존재의 무게까지 잡아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 덩어리들이 지닌 유령적 속성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정보의 가상적 체험의 수준을 넘어 우리 몸에 각인될 때 그것의 프로세스는 이전까지의 현실적 정보들, 그리고 우리의 몸을 통해 익혀 알게 되던 것들과는 다른 차원의 그리고 성질의 것임을 말이다. 이러한 정보 및 기록들은 물리적인 기반과 지시 근거체에 의존하지 않는다. 존재상, 현실의 구성 성분으로 파악되기 어렵지만 그것은 실재한다. 따라서 가상과 현실, 두 세계 사이를 오가며 현존하는 일종의 유령적 존재로 간주된다. 만약, 이러한 접근들이 리얼리즘을 새롭게 규정하는 포스트 리얼리즘의 맥락에서 이해된다면, 김웅현은 새로운 현실 [혹은 새롭게 보아야 하는 현실]과 그 곳에서의 거주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발생하는 유희적 요소를 추적하는 포스트 리얼리즘 작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설정하는 현실과 그로부터 제시되는 유희적 요소는 앞서 두 세계의 사이, 그리고 그 간극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우리가 거주하는 가상의 영토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제시하는 현실에서의 거주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리고 여기에서 어떻게 유희성이 발현되는가?

   정보는 그 자체로 선-악의 구분이 필요치 않는 가치-중립적인 그 무엇이다. 그러나 정보에 맥락이 입혀지고 의도가 더해질 때, 그것에는 가치가 부여되고 선과 악으로의 상대적 입장이 가능해진다. 우리의 현실이 매체에 의한 가상적 맥락에서 세워질 때, 그 속에서의 정보는 그 자체로의 순수성을 박탈당한다. 그것도 매우 폭력적인 양상으로 말이다. 사건은 존재하는데, 그 존재 자체로 인식되거나 기억되지는 않는다. 사건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이제 우리는 그것의 해석에 주목한다. 매체는 사건을 전달하는 동시에 번역하며 우리는 그러한 번역을 다시금 해독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웅현의 <Kathera Quick, 2014>은 이러한 해석-다양체적 세계에서의 정보 운송/이동에 관한 조명이 된다.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가 아닌 다른 출처에서 얻은 정보에 ‘카더라 통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작품 제목은 이로부터 기인한 것이며 여기에 ‘퀵(Quick)'이라는 수식이 붙는다. 사실, 작품 제목에서의 퀵은 수식이 아닌 그것을 받는 대상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물품 배송 서비스의 이름이다. 형용사가 대명사로 사용될 때, 그것은 명사로서의 한정을 뛰어넘는 속성을 발현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속성은 우리의 현실에서의 필요가 더해진 무엇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퀵 서비스’는 우리 사회가 열망하는 속도를 대변한다. 그리고 김응현의 작품은 그 속도로부터 탈선하는 의미와 가치들을 상징한다. 빠른 정보 전달과 그에 의한 해석의 확산은 분명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의 전달자로서 퀵 서비스 기사와 우리는 정보의 본질을 들여다보지는 못한다는 공통점을 공유하기도 한다. 맥루한의 전언처럼, 매체는 드디어 메시지로 기능하게 되었고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의 환경에 놓여지게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매체의 힘이 메시지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 왜곡의 현장에 결국 우리도 동참하고 있다는 피하고 싶은 사실이 우리를 기다린다. ‘카더라’라는 말은 다른 누군가를 상정하는 타자의 언어로 인식되지만, 결국 그것은 나라는 주체의 발언이며, 그 주체는 우리 모두의 집단적 의식으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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