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준의 문화/예술 비평

서정희 / 욕망과 불안감 : 이중-속박으로서의 흔적 본문

Arts & Artists

서정희 / 욕망과 불안감 : 이중-속박으로서의 흔적

yoo8965 2016. 4. 13. 01:12

Trace_no.01_UNRAVEL, Ratio 2500/1080 . 10Min. 2015. NB. Stereo . No dialogue



그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백색의 공간 속에서 부유하며 나지막히 읊조린다.
“이제 나는 여기서 꿈을 꾼다. 당신과 함께 꿈꾸던 아름다운 기억들을 잃어버린 채”

작가 노트 중 -



#1 고정된 불안감

   서정희의 작업에서 무언가에 대한 지속적인 메시지를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다.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그녀가 제작해 온 영상 작품들은 우리 자신과 사회를 둘러싼 다각적인 의미 층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맥락 또한 상이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몇몇 메타포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첫 번째로 제기되는 메타포는 불안감이다. 초기작인 <EVE>와 <WIND>로부터 최근작인 <Trace>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작업은 공통적으로 무언가에 관한 불안한 감정을 전제한다. 2007년작인 <EVE>와 <WIND>는 정지되어 있는 이미지와 그것이 어떤 운동성을 가지게 될 때 발생하는 안정과 불안정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안감에 주목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러한 불안감을 느끼는 요소들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지점과 매우 상이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정의되지 않는 어떤 것, 그리고 급박하게 움직이는 대상들로부터 일종의 불안감을 느낀다. 그러나 작가가 주목하는 불안은 이러한 안정된 상태가 제기하는 의미의 고정화로부터이다. 즉 이 작품들은 이미지를 간단하게 손으로 뒤에서 움직여 끊임없이 고정되어버리려 하는 의미를 지속적으로 뒤흔든다. 이미지가 무빙 이미지로 변화하는 지점에서 이미 그러한 탈-정의는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가 주목하는 불안감은 지속적으로 변화해야하는 의미들이 고정된 채 박제되어 버릴 때 발생한다.


COALESCENCE, FILM EXPERIMENTAL . HDV. 16/9 . 2min40. 2008 . 25fps . Stereo. No dialogue


이러한 불안감은 <COALESCENCE, 2008>에서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이 작품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빨간 모자’ 이야기를 다른 관점에서 분석하는데, 프랑스의 동화작가 샤를 페로가 1697년에 발표한 동화집 “옛날 이야기 Histoires ou Contes du Temps Passé”에 수록된 작품인 ‘빨간 모자 Le Petit Chaperon Rouge’는 매우 단편적인 스토리 구성을 가지고 있지만, 작가에게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은 어떠한 잠재적 가능성, 불안감을 배태한 무엇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펼쳐내는 일련의 사건은 그리 단순한 교훈적 이야기로 끝나지 않은 채, 수 많은 이야기의 가능성을 내포하며 전개된다. 주요 등장인물인 소녀, 늑대, 할머니는 모두 무언가를 감추는 인물들이다. 작가의 해석에 따르면 소녀는 빨간 망토 속에, 늑대는 할머니로의 변장 속에, 할머니는 늑대 배 속에 숨겨지고 가려진 존재들이다. 이러한 감추어진 것들은 특정 욕망의 덩어리들을 상징하는데, 스스로에 관하여 혹은 타자에 관한 기표로만 남겨진 채 현실화되지 못하는 욕망으로 잔존한다.


#2. 욕망과 속박의 이중구조



HOLE_LY, EXPERIMENTAL FILM / ANIMATION . ONE CHANNEL VIDEO PROJECTION . HD. 16/9 . 3Min. 2014. Color& NB. Stereo . No dialogue https://vimeo.com/112364684 ( password : upbnholely)



   두 번째 메타포는 대상에 대한 욕망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이중적 속박의 감정이다. <AND, SHE WILL SMILE LIKE A LIE..., 2008> 및 <SE-WEEP, 2011>, <HOLE_LY, 2014>에 이르는 그녀의 작품들은 각기 다른 대상에 관한 욕망을 드러낸다. 2008년작인 <AND, SHE WILL SMILE LIKE A LIE...>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오즈의 마법사’의 이야기 구조 속에서 암시적으로 드러난 현실에 관한 욕망을 꼬집는다. 작가는 이 소설을 영화화 한 작품 속에서 몽환적으로 제시되었던 영화 속 세계의 미장센들을 다시금 재-매개한다. 그러나 이러한 매개 작용은 오히려 작가가 드러내려 한 현실의 이미지에 관한 관객들의 욕망을 부추기게 된다. 따라서 작품은 현실에 관한 이중의 욕망,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속박 구조를 전제한다. 만약, 이 작품과 2011년작 <SE-WEEP>이 보다 본질적인 세계-자아-진실에 관한 욕망을 1차적으로 드러내는 작품들이라면, 2014년작 <HOLE_LY>에서는 보다 강화된 욕망-속박 구조를 경험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강인한 팔로 여체를 움켜쥐고 있는 남성과 머리를 바닥에 곤두박고 있는 여체의 모습이 나타난다. 각각은 위에서 언급한 남성에 의해 강탈당한 육체와 전두엽 절제술을 시행당하여 지적 능력 및 언어적 능력을 박탈당한 신체를 상징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로즈마리 케네디라는 상징적 기표를 작품 속에서 뚜렷하게 등장시켜 이러한 신체의 박탈이 남성(아버지)에 의해 폭력적으로 수행된 결과임을 암시한다. 이는 일면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차의 문제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남성이라는 기표로 상징화되는 사회로부터 거세당한 존재에 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신체적 - 정신적 측면에 가해지는 거세는 그 자체로 무자비한 폭력이다. 여기서 이러한 폭력이 자행되는 공간과 맥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품은 어두운 공간 속에서 등장하는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로 구성된다. 마치 조각상의 모습을 본 따 만든 듯한 이미지는 실재하는 구체적 상이 아닌, 매우 인공적이고 상징적인 도상으로 제공된다. 이러한 도상의 효과는 보다 암시적이고 우회적인 주제에 대한 접근 방식에 있다. 상징적 이미지는 주제가 전달하려는 바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작품이 실행되는 중간 사이에 삽입되는 자막들은 이러한 우회적 이미지의 상처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고 주파음으로 상징되는 두통 혹은 지적장애는 뒤이어 따라오는 삽입음과 함께 제거된다. 그러나 이는 본질적인 장애와 아픔의 해소가 아니다. 마치 실험대에 누워있는 대상체처럼, 피 실험자는 실험에 의한, 그리고 폭력에 의한 부작용과 콤플렉스라는 흔적-징후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3. 재난의 징후, 그리고 흔적으로서의 사건

   이와 같은 불안감과 욕망, 그로부터의 속박은 결국 하나의 사건으로 귀결된다. 불안감과 욕망은 어떠한 사건의 징후로서 존재하며 그것에 대한 속박은 사건 이후의 남아있는 흔적으로부터 발생한다. 징후(徵候)는 어떠한 결과가 도출되기 전 나타나는 존재론적 현상이다. 결국 징후의 대상은 현재에 존재하지 않지만, 징후 자체는 현실에서 확인될 수 있는 사건이며 미래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사건에 관한 일종의 가설이다. 이러한 징후의 인식적 도식은 생각보다 많은 부분에서 다양한 시나리오를 가능하게 만든다. 징후는 잠재적 힘의 형태로 현재에 나타나는 것이기에 시간을 전제한 존재론적 역설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즉, 징후는 결과의 실존을 전제하기에 징후일 수 있는 것이지만, 사실 징후가 결과의 현실화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서정희가 주목하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다.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역설 - 징후를 추종하고 현실은 개의치 않는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그것이다. <Sing Under, 2012>와 <Trace No.1, UNLAVEL, 2015>는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기 전 나타나는 그것의 징후와 사건 이후 우리의 기억 체계 속에 안주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어떤 것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Sing Under>에서는 폐쇄된 공간에 갇혀있는 어떤 인물이 등장한다. 등을 보이며 앉아있는 대상에게서 검은 액체가 흘러나온다. 산업적 폐기물(유)처럼 보이는 이 액체의 범람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반복되어온 재난의 역사를 상징한다. 화면 속에서 등장하는 박제된 듯한 동물들의 이미지들은 이러한 우리의 재난의 역사가 고대로부터 거듭되어온 징후와 사건, 그리고 그것의 흔적들의 연대기임을 추측케 한다. 이로부터 관객은 서정희가 주목하는 사건 이후 발생하는 작용들에 관한 접근이 단순히 사후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된다. 즉, 어떤 사건 자체가 아닌 사건으로부터 만들어진 흔적들은 또 다시 다른 일련의 사건들의 징후로서 기능하는 반복체로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는 이 도식은 일반적으로 우리의 인식 범주 속으로 들어오지는 못한다. 우리는 징후를 사건의 사전적 개념으로, 흔적은 사후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살펴보자면, 2015년작 <Trace No.1, UNLAVEL, 2015>은 우리들의 아직 아물지 않은 잔재되어 있는 것들, 좀 더 극적으로 이야기해보자면, 잠정적이고 잠재적인 사후 사건의 처리 과정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적막한 어두움 속에 소리가 침투한다. 소리의 근원지는 파악되지 않은 채 불안감은 고조된다. 화면 속에서는 명확한 형체가 드러나지 않으며 소리는 점점 더 커지게 된다. 일정 시점 이후 우리는 그 소리가 지난 세월호 사건의 유가족들의 아우성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들은 명료하게 메시지화 되지 못한 채 풀리지 않은 매듭처럼 화면 속에서 명멸하다 종국에는 소멸한다. 마치 세월호 사건이 그 자체로 이미 우리들에게 국가적 재난 및 안전의식 불감증이란 기호로 남아 있지만 사건에 대한 후속 과정과 해석들은 아직까지도 미결정의 여지를 가진 채 기호화 되지 못한 무엇으로 우리 주변을 떠도는 것처럼 말이다. 국가에서는 세월호 거대한 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장례식을 진행했다. 사건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현재가 아닌 과거로 기억된다. 사건과 그 이후의 상황들은 더 이상 회자되지 않으며 더 이상 매체들에 의해 현재화되지 않는다. 세월호의 이름은 우리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과거의 사건으로 남게 되었고 사건의 망자들은 희생자라는 이름으로 박제된다. 그러나 희생자들의 유족들은 명패 없는 이름이 되어 현재와 과거 사이를 떠돌게 된다. 이러한 유령적인 것들, 소멸되지 않는 흔적들은 결국 우리의 사유-체계 속에 들어오지 못한 것들이다. 사건으로 인해 이 세상을 떠난 망자들의 곁에서 그러한 망자와의 관계를 끌어안은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러한 흔적들은 지울 수 없는 각인된 상처이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최소한의 의미 체계를 가지지 못한 채로 이미 과거가 되어버려 망각되어야 할 무언가가 된다. 따라서 흔적은 다시금 기억으로 박제될 수 없는 생생한 언술로서 존재한다. 작가는 이러한 이중의 노출을 하나의 사건 속에서 발견한다. 그러나 그러한 노출은 서로를 겨냥하는 동시에 서로를 구속한다. 마치 내부로 함입된 외부와 외부로 유출된 내부가 이중적인 속박 구조 속에 묶여 있는 것처럼 말이다.




2015년 10월. 난지 스튜디오 비평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