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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미지-세계의 변증법적 종합 : 3D Image

yoo8965 2014. 12. 9. 02:30

Georges Méliès, <A Trip to the Moon>, 1902



이미지의 평면성과 마법적 환영


   이미지는 결국 평면적이다. 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인식되어온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자 사고 체계였다. 이미지가 특정 오브제에 관한 재현의 역할을 수행할 때부터, 이미지와 실체의 구별은 그것의 존재론적 성분을 넘어 결국 그것이 지닌 차원상의 문제로 귀결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도식은 변화하고 있다. 기술 매체와 결합한 이미지는 적극적으로 2차원을 벗어나 3차원의 것으로 현상하고 있으며, 디지털이라는 근본적인 성분 변화로부터 지시-대상이라는 이전의 전제를 필요치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의 변화가 기술적 진보로서 이야기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이 꼭 예술적인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지를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예술의 목표는 기술과는 다른 차원의 접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로 영화 스튜디오에서 영화를 제작한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éliès)는 두 대의 카메라로 영화를 찍곤 했다. 그가 두 대의 카메라를 이용한 이유는 미국과 유럽에 각각 자신의 영화 프린트를 보내기 위함이었다. 그가 만약, 두 대의 카메라를 겹쳐서 우리가 현재 열광하는 3D 영화 이미지를 만들었다면, 우리는 3D로 구현된 <달세계 여행 A Trip to the Moon, 1902>을 보다 일찍 만나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3D로 상영되었다고 가정해보자. 무대 연출을 기본으로 하는 그의 작업은 평면 이미지가 제공하는 상상의 영역을 실제의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며, 이와 동시에 그의 필름이 가진 마법적 기능은 오히려 축소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이미지의 최종 목표가 현실과 유사한, 혹은 현실처럼 느껴지는 유사-현실성 자체에 있는 것만이 아님을 설명해준다. 이미지는 평면이지만, 평면이기 때문에 그것을 마주하는 이들의 적극적인 개입을 필요로 한다. 즉, 감상자의 사유와 인식이 이미지의 재현성을 발현시키는 원천적 요소이다. 이에 비하여 3D 이미지는 정-반-합의 절차를 거쳐 우리의 인식 속에서 종합되는 하나의 상(像)이다. 과거 이미지가 자유로운 상상에 의한 평면 속의 깊이를 우리에게 제공했다면, 3D 이미지는 우리에게 각각의 상에 관한 종합적 인지를 요구한다. 따라서 이전까지와는 다른 인식 체계를 필요로 한다. 아마도 우리는 그것을 차원을 걸쳐 존재하는 이미지들을 종합하는 기술적 상상력, 그리고 이를 수반한 감각적 사유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기술적 형상으로서의 이미지

   현대에 들어와서 이미지의 지위는 더욱 강력해졌다. 과거로부터 이미지는 스스로가 지닌 지시 대상에 대한 마법적이고 환영적인 기능으로부터 인류 역사의 주요한 순간을 기록하고 재현해왔다. 그러나 이미지가 지닌 환영적 기능은 실제 오브제가 되지 못하고 그리하여 환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스스로의 모순적 운명에 의해 폄하되기 일쑤였고, 기록적 매체로서 문자에 비하여 그것을 보완하거나 보충하는, 혹은 상대적으로 그보다 열등한 매체로서의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이는 문자로 대변되는 이성적 사고에 비하여 이미지로부터 파생되는 감각적 지[知]를 열등하게 보는 서구의 철학적 관념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을 테지만, 문자에 의해 형성된 역사적 의식으로부터 파생된 고정 관념일 수도 있다. 이미지가 스스로의 지위를 회복한 것은, 현대적 의미의 미학 개념이 성립된 1750년 바움가르텐 (Alexander Gottlieb Baumgarten)의 ‘아에스테티카(Aesthetica)’라는 감각에 관한 새로운 사유에 의한 것이었다. 바움가르텐은 이전과 같이 사유방식을 계층화하는 것에 반대하며 감각적 사유의 영역을 제안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감각적 사유는 이미지를 경험하고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으로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이미지를 바라보는 우리 인식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미지의 위상이 현재의 수준으로 올라선 것은 근대 이후 기술 매체와의 적극적인 결합의 결과이다. 매체 철학자인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는 이러한 기술적 이미지를 ‘기술적 형상(technisches Bild)’이라 부르며 인류가 탈역사시대-탈문자시대에 들어섰다고 언급하는데, 그에 따르면 문자 시대에 들어서 개념으로 대체되었던 상상력은 기술적 형상에 의해 다시 소생한다.[각주:1]

   기술 매체들은 이미지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시켰다. 더 이상 이미지는 지시 대상 없이 홀로 생성될 수 없는 존재가 아니었으며 환영적인 차원으로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지가 자신의 일루젼을 스스로 파괴하고 실존하게 된 것일까? 이미지는 이전까지 재현의 매체였다. 이미지를 보는 순간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미지 속의 대상은 지금-여기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역설적 사실이다. 그러나 지시 대상이 필요치 않게 되었다고 이미지가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플루서가 기술적 형상을 언급하며 조건 지었던 ‘장치(Appart)’라는 선행 요건과[각주:2] 그러한 이미지와 연동되는 ‘기술적 상상력’이 요구된다. 우선 ‘장치(裝置)’의 개념을 떠올려보자. 사전적인 의미에서는 어떤 목적에 따라 기능하도록 기계나 도구 따위를 그 장소에 장착하는 것 또는 그 기계 자체를 지칭한다. 다분히 도구적이고 기능적인 의미이지만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장치에 관한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플루서에게 있어서의 장치 개념은 보다 확장된 형태의 의미를 포괄한다. 그에게 있어 장치란 ‘사고를 시뮬레이션하는 유희도구’인데, 그는 이것을 과학적 텍스트의 산물이라고 규정한다. 즉, 인식과 사유를 위한 과학-기술적 도구 개념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자면, 이미지와 연관된 장치의 주된 기능은 이미지의 지평을 (존재론적으로) 확장시켜주는 동시에 비가시적 사고의 형태를 가상적인 것으로부터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도구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이미지와 장치, 재현에서 가상화로

William Hyde Wollaston, camera lucida, 1807


   1839년은 우리에게 카메라가 발명된 년도로 회자된다. 물론, 카메라의 발명과 함께 이미지와 기계 장치들의 만남은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미지와 연관된 기술적 장치들은 과거로부터 다양한 형태로 등장해 왔다. 13세기에 발명된 망원경은 멀리 떨어져있는 시각적 세계를 우리 눈 앞으로 확대하여 옮겨주었으며, 1558년 경에는 지오바니 바티스타(Giovanni Battista della Porta)는 자신의 책을 통해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의 형태를 예견하였다. 1807년에는 윌리엄 하이드 올스타인(William Hyde Wollaston)에 의해 개인이 소지할 수 있는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와 같은 장치 또한 고안되었는데,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광학적 카메라가 발명되기 이전, 인간과 세계, 이미지를 연결하는 기계 장치들이었다. 이러한 장치들은 세계의 이미지를 보다 현실적인 차원으로 우리에게 매개하기 위한 장치들이었으며, 우리는 이러한 장치를 통해 세계를 기록하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1833년 만들어진 스테레오스코프(stereoscope)는 보다 현실적인 이미지를 관람객에게 제공했다. 두 개의 이미지를 합쳐 하나의 종합적인 상을 만들어내는 스테레오스코프는 이전의 장치들과는 달리 평면에 입체 이미지를 재현함으로서 환영적 거리감을 제공했다. 이러한 거리감은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의한 상호작용성과 함께 이전까지의 예술의 목표를 변화시켜 버렸다. 티모시 머레이(Timothy Murray)는 디지털의 상호작용적 미학으로부터 예술 프로젝트들은 ‘재현(representation)’에서 ‘가상화(Vitualization)’로 이동한다고 언급한다. 즉, (디지털) 이미지는 더 이상 재현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가상적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Char Davies, <Osmose>, 1995


   제프리 쇼(Jeffrey Shaw)의 1986년 작 <The Golden Calf>와 샤 데이비스(Char Davies)의 1995년 작 <Osmose>는 가상적 환경을 통한 예술의 가능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두 작품은 상반된 입장에서 가상현실을 다룬다. 쇼의 작업이 모니터를 통해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를 가상적으로 그러나 현실 속에서 마주하게 만드는 이른바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적 작업이라면, 샤 데이비스의 작업은 HMD(Head Mounted Display)를 착용하고 이미지로 둘러싸인 다른 세계로의 이동을 전제한 완전한 VR(Virtual Reality) 작업이다. 쇼의 작업에서 관객은 가상적으로 존재하는, 그러나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황금 송아지’를 경험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관객들은 현실 속으로 침투하고 있는 가상적 이미지들을 마주하며 이미지의 존재론적 위상의 변화를 떠올리게 된다. 이처럼, 쇼의 작업이 현실로부터 가상을 상기시키는 시도라면, 샤 데이비스의 작업은 오히려 가상으로부터 현실을 반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데이비스의 작업에서 관람객들은 입체감을 주는 HMD와 자신의 호흡과 움직임을 탐지하는 실시간 모션 감지기를 착용하고 작가가 만들어놓은 가상공간으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이 작품의 흥미로운 점은 이전의 가상현실 체험기구들이 현실과 유사한 유사-현실 시뮬레이터로서의 기능을 강조한 것과는 달리 현실과 대비되는 느낌과 경험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가상적 스펙터클의 역설 


Robert Lazzarini, <Skulls>, 2000


   위의 사례들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사실은 예술에 있어서의 3D 이미지를 통한 가상현실의 구현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기보다는 목적에 다가가기 위한 반성적 수단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로버트 라자리니(Robert Lazzarini)의 <Skulls, 2000>은 이러한 반성적 측면을 잘 드러낸다.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대사들, 1533>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의 작업은 인간의 실제 해골을 레이져로 스캔하여 3차원 CAD 파일을 만든 뒤, 이를 2차원 평면에서 뒤틀어버린다. 왜곡된 2차원의 정보-이미지들은 다시 3차원적 조각 작품으로 주조되는데, 작가는 이를 네 개의 벽면에 각각 설치한다. 관객들은 네 개의 벽면에서 서로 다르게 왜곡된 형태의 해골을 보며, 그 왜곡을 보정하기 위해 다양한 각도로 자신의 시점을 이동시킨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행위는 정답을 찾지 못한다. 왜냐하면 한스 홀바인의 작업에서 이미지를 비스듬히 보며 관객들이 경험했던 왜곡의 시-지각적 보정이 이 작품에서는 구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러한 통로 자체를 봉쇄하여 불확정성의 중심으로서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우리는 이미지를 통해 우리가 직접 마주할 수 없는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경험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스펙타클은 그 자체로 우리 앞에 현전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의 기능을 수행하는 역설을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기술은 스스로의 발전을 통해 우리의 인식과 지각 능력을 상회하는 현상-왜곡의 욕구를 점차 드러낸다. 특히 이미지와의 결합을 통해 과거 인류에게 기능했던 환영적 순간을 일반적 상황으로 확대시킨다. 즉, 이미지를 통한 상상은 환상-환각의 영역으로 재생산된다. 플루서의 말처럼, 상상력이 환각(Halluzination)으로 역전되는 것이다. 기술은 본래의 기능적-도구적 한계를 벗어나 우리에게 삶의 환영적 플랫폼으로 작용하며 인간은 그러한 기술적 이미지를 해독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 기능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3D 기술-이미지는 이미 존재론적으로 이미지의 실제성을 촉각적으로 경험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로부터 예술이 취하게 되는 자세는 그러한 경험의 강화가 아닌 촉각적 경험의 실체에 관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예술에게서 이러한 왜곡을 해체하는 열쇠를 기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술은 그러한 해체를 직접적으로 수행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술-매체의 틈에 드러난 역설의 순간을 더욱 강화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기술-이미지-세계에 관한 변증법적 종합의 순간 혹은 반성의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월간 퍼블릭아트 2014년 8월호 기고글



  1. 플루서는 이러한 기술적 형상을 언급하며, 이러한 기술적 형상시대에 필요한 기술적 상상력(Technoimagination)을 언급한다. Flusser, V. Kommunikologie, 김성재 옮김(2001). 『코무니콜로기』. 커뮤니케이션 북스, 226p 참조. [본문으로]
  2. 플루서는 기술적 형상에 관하여 ‘사고를 시뮬레이션하는 유희도구’로서의 장치를 이용해 만들어진 그림이라 명명한다. 그는 이러한 장치가 과학적 텍스트의 산물이기 때문에 기술적 형상은 전통적인 그림과는 다른 지위 - 역사적, 존재론적으로 -를 부여받는다고 주장한다. Flusser, V. Fur eine Philosophie der Fotografie, 윤종석 옮김(2001).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 커뮤니케이션 북스, 16p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