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준의 문화/예술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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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화된 판타지, 픽셀로 만들어진 현실

yoo8965 2013. 9. 26. 03:49



    결국, 이미지는 현실을 조작한 일루젼이다.

 

   이미지는 과거로부터 현실 재현을 위한 매개체였다. 동굴 벽화 시기에서부터 이미지는 현실을 기록하거나 전달하기 위한 도구였고,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상상력을 현실로 구체화시키는 현실 재현을 위한 환경 자체였다. 인간은 이미지를 통해 자신만의 이미지-세계를 구현하였고 그러한 세계는 결국 우리가 경험했던 순간의 재현이자 꿈꾸어왔던 환상에 대한 일루젼으로 나타났다. 한 때, 사진이라는 기계적 이미지는 이러한 현실과 이미지의 관계를 결정짓는 듯 했다. 정밀하게 현실을 반영하는 사진-이미지는 강력한 현실 재현성을 바탕으로 '사진=현실'이라는 등식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이러한 현실과 이미지의 관계에 새로운 흐름을 제시하였다. 디지털은 매체의 근본적 구조를 변화시켰으며 현실을 직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과 가까운 이미지인 사진 이미지 조차도 과거의 굳건한 믿음으로부터 벗어나 일종의 가상적 이미지 세계임이 드러났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미지의 잠재적 현실 조작 가능성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디지털 이미지는 숫자의 조작을 통해 사진적 이미지의 특성, 즉 사실적인 현실성을 기반으로 현실과 유사한 가상 세계를 창조하였다. 과거, 현실로 인식되는 이미지는 사진이 만들어낸 기계적 이미지를 의식한 하이퍼-리얼리즘에 와서야 완성되었다. 그러나 하이퍼리얼리즘은 현실처럼 정밀하되,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미지를 구현했다. 디지털 이미지는 이와같은 하이퍼 리얼리즘의 전략을 충실히 따르며 예술사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된 재현의 문제를 예술에서 분리시켜 상업적 시장에 풀어놓았다.


찰스리_Charles Lee_Candy Factory_digital print_102x51cm_2013


   <The Fantasy in Spring> 展은 상업적 시장에서 활발하게 시도되고 있는 컨셉 아트(Concept Art)를 소개하는 전시이다. 컨셉 아트는 영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게임에서 많이 사용되는데, 장르와 형식을 넘나들며 다양한게 전개되는 각 장르의 시각적 상상력을 구현한다. 이른바 재현(Representation)을 위한 일종의 예상도(pre-visualization)이자 가상적 미장센(Mise-en-Scène)이다. 전시에서 소개되는 작가들은 이 공식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특히 한국계 미국인 디자이너 찰스 리(Charles Lee)와 림 허(Lim Hur)는 환상적인 가상의 풍경을 실제의 화면으로 구현하는 작가들이다. 이들은 다양한 산업 영역의 시각 창작물을 제작하여 왔는데, 대중적으로 인기를 끈 게임들(갓 오브 워 God of War, 콜 오브 듀티 Call of Duty)도 그들의 작업에 포함되어 있다. 이들의 작업은 매우 명료하다. 현실에 기반한 우리의 상상력을 증폭시키는 방식인데, 현재의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 혹은 외계의 행성에서는 존재할 법한 가상 세계 속의 리얼리티 구현에 집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작업 속에서는 환상적인 가상 세계가 펼쳐지지만 동시에 이질적인 현실감이 존재한다. 만약, 미래가 우리 앞에 펼쳐진다면 바로 그들의 시각적 구현물이 실체화 될 것처럼 말이다.


림허_Lim Hur_Beginning of a girl's journey_digital print_79.48x35.28cm_2013


그러나 디지털 이미지의 딜레마는 의외의 순간에서 드러난다. 디지털 이미지는 그것이 지닌 본질적 특성을 발전시키기 보다는 아날로그적 현상으로 제한시켜야 하는 당위를 가진다. , 디지털의 특성 자체가 현실과는 무관한 숫자의 세계이고 무제한으로 확장될 수 있는 시지각의 세계일텐데, 우리가 디지털에게 요구하는 이미지는 결국 현실적 세계로서의 인식 가능성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하이퍼 리얼리즘이 현실처럼 보이되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순간을 묘사했다면, 디지털 이미지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가상의 환경을 구축하되 현실성이 느껴져야 한다. 가령,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통해 현실을 넘어선 환상적인 가상 이미지를 창조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 역시 인간인지라, 스스로가 경험해 온 현실의 법칙이 통용되는 순간에 몰입감을 경험하게 된다.  

 

이영운_질투_digital print_150x150cm_2013



반면, 이영훈과 박성훈은 이러한 현실성에 기반한 재현이라는 의무감에서 조금은 자유로운 듯 보인다. 그들의 작업은 앞서의 두 작가와는 달리 보는 이들의 현실적 몰입감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은 그들의 컨셉 아트 작업들이 목표로 하는 최종 결과물의 장르적 성격과도 무관하지 않다. 영화와 게임은 갈수록 형식적 리얼리티에 집중하는 반면, 애니메이션과 캐릭터 디자인은 허구적 세계로의 열망을 좀 더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좀 더 개인적인 예술 작품에 가까운 이영운의 작업과 애니매이션에 등장할 것 같은 다양한 캐릭터들을 묘사한 박성훈의 작업은 디지털 리얼리티의 속박에서 벗어나 있다.

 

   이번 전시에서 제시되는 컨셉 아트는 가상과 현실을 넘다들며 관객들에게 그 간극에서 느껴지는 판타지를 경험하게 한다. 우리는 때로 새로운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보여줄 수 있는 놀라운 현실적 이미지에 경탄하면서도 동시에 현실과 거리가 있는 가상적 이미지에 대한 동경을 함께 갖는다. 컨셉 아트는 이러한 모순적 세계를 우리에게 설득력있게 전달하는 과정이다. 혹자는 컨셉 아트가 최종 결과물이 아닌 결과물 이전의 과정적 단계라는 점에서 독자적인 장르로서의 부적절함을 지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컨셉 아트가 그 이름처럼 최종 결과물을 도출하기 위해 제시되는 개념 자체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이러한 과정이 가지는 독립적 가치는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현실이 되어버린 최종 결과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예술적 시도와 그것의 경계를 컨셉 아트를 통해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실체화된 판타지, 픽셀로 만들어진 현실 : <The Fantasy in Spring>展, 전시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