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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에 관한 소고

yoo8965 2022. 8. 18. 19:07

 

2003년 출간되어 미술비평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 상황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던 제임스 엘킨스(James Elkins)의 저서 『미술비평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What happened to art criticism?』는 ‘미술비평 : 독자 없는 글쓰기 (Art Criticism: Writing Without Readers)’라는 제목의 챕터로 시작된다. 미술비평 역시 보편적으로 글이라는 매개 안에서 작동되는 형식이라는 점을 떠올려 볼 때 해당 제목은 미술비평이 지닌 약점을 뼈아프게 드러낸다. 독자를 전제하지 않는 글이라니, 물론 과장된 수사이겠지만 (미술)비평이 문자가 만들어진 목적을 오염시키며 동시에 자기애에 빠져 허우적대는 상황에 놓여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느 순간 미술비평은 그저 의뢰를 받아 결과물을 생산하는 의례적 과정으로 전락했다. 비평이 닿아야 할 독자들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마감일과 글의 대상만이 조용히 필자를 노려본다. 물론 이에 관한 변명거리는 있다. 가령 대단히 수동적이며 제한적인 국내 미술비평의 상황(미술관 및 갤러리의 요청을 받아 진행되는 형태)은 역설적으로 미술비평가들을 독자들을 향해 구애하는 몸짓에서 해방시켰다. 어차피 한정된 사람들만을 위한 제한된 글쓰기라는 오명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며 그렇게 자위하듯 글을 쓰게 되는 것이다. 또한, 비평이라는 글쓰기의 형태가 운명적으로 지닌 정체성에서 비롯되기도 하는데 비평가는 필연적으로 창작자의 위치를 점유하지 못하기에 작품에 기생하는 단순한 전달자의 역할에만 충실하게 된다. 여기서 더욱 고약한 점은 그저 단순한 전달자로는 성에 차지 않아 현학적인 수사를 덧붙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내 비평의 글은 더더욱 독자들과 멀어지게 되고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남아 예술을 찬양한다.

 

사실 미술비평은 꽤 즐거운 작업이기는 하다. 여전히 미술비평가 혹은 평론가라는 정체성은 맞지 않는 옷처럼 거추장스럽고 부담스럽지만 대상이 되는 예술 작품을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음미해보고 작가의 의도를 헤아려보는 일련의 작업은 창작의 최전선에서 한발 물러나 있다는 안도감을 제공해주는 한편 그것을 평가한다는 자족감마저 보장한다. 비평(批評)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사물의 미추(美醜), 선악(善惡), 장단(長短) 등을 들추어내어 그 가치를 판단하는 일’로 규정되어 있는데, 그렇게 예술 작품의 이곳저곳을 들추어내는 과정에서 희열이 발생하는 것이다. 다만 독자의 존재가 선명해져야 하는 순간 역시 바로 이 지점임을 상기해야 한다. 만약 이 지점에서 비평이 자신이 경유해야 하는 대상(예술 작품)을 목적지로 착각하고 맹목적인 전진만을 일삼는다면 위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미술비평은 그저 예술 혹은 그것을 관찰하기 위한 관념에 매몰되어 목적지 없는 항해를 거듭할 뿐이다.

 

따라서 필자에게 미술비평은 언제나 조심스러운 작업이었다. 작품에 함축된 의미의 사슬을 헤쳐나가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대상이 되는 예술 작품 및 글이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로서 독자의 존재가 아득히 멀게만 느껴진 까닭이다. 그럼에도 건강한 그리고 생산적인 미술비평이 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그것을 읽는 이들을 전제해야 한다. 소박한 언어를 사용하되 그것을 감추어 줄 화려한 수사에 기대지 않아야 하며 예술 작품과 독자 앞에 자신을 두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비평이 있어야 하는 장소를 끊임없이 성찰하는 것, 이것이 비평의 대상과 목적지 모두에게 유익하고 유용한 미술비평의 덕목일 것이다.

 

 

월간미술 2022년 8월호 기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