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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 그 자체로 아름다운 : 웹툰 <연의 편지> 리뷰

yoo8965 2020. 2. 24. 01:01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 그 자체로 아름다운
조현아, 웹툰 <연의 편지> 리뷰

 


   지극히 일상적인 어느 날, 주인공인 소리는 학교 폭력(동급생에 대한 왕따 문제)에 맞서게 된다. 옳은 일이라 생각하며 따돌림을 당하는 친구 편에 섰지만, 어느새 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만 소리. 심지어 자신이 편들어 준 폭력의 희생자였던 지민까지 전학을 가버린 지금, 소리는 원래 살던 곳인 아빠의 집으로 쫓기듯 돌아가게 된다. 웹툰 <연의 편지>는 이렇듯 집단 따돌림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며 시작된다. 최근 부쩍 커지고 있는 학교 폭력, 왕따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인가? 라는 의문도 잠시, 새롭게 전학 간 학교에서 마주하게 되는 한 장의 편지는 소리와 독자들을 아름다운 추억의 시간과 장소로 인도한다. 마치 지브리 스튜디오(STUDIO GHIBLI INC.)의 애니메이션과 아다치 미츠루(Adachi Mitsuru)의 작품을 떠올리게 만드는 아름다운 그림체와 순수한 스토리의 이 작품은 잊고 지낸 스스로의 인연을 그리고 그러한 관계들이 빚어졌던 추억의 시간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전학을 간 학교에서도 이전 학교에서의 아픔이 반복될까 걱정하던 소리는 책상 밑에서 겉봉에 ‘안녕’이라고 적혀있는 한 장의 편지를 발견하게 된다.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지만 편지를 보낸 이를 찾을 수는 없다.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오히려 경계하는 시선 속에서 마주한 이 다정한 인사말은 어느덧 주인공의 닫힌 마음을 열게 만든다. 편지의 내용은 학교 지도와 반 친구들에 대한 소개 그리고 두 번째 편지에 대한 단서뿐. 그러나 두 번째 편지를 찾으러 도서관으로 가는 소리의 발걸음에 벌써부터 독자들은 희망과 설레임을 담아내게 된다. 이윽고 마주한 송신자인 호연이라는 이름, 소리는 도서관의 대출 카드에 적혀있는 그 이름을 곱씹어보지만 반 친구들 이름에서도 혹은 자신의 기억에서도 찾을 수 없는 이름임을 알게 된다. 이쯤 되면 독자들 역시 호연이라는 인물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되는데 작가는 매우 자연스럽게 작품의 장르를 귀여운 추리물로 변경하여 독자들의 동참을 유도한다. 현재의 편지에 적혀있는 다음 편지의 단서, 각 편지의 내용은 소리와 독자들에게 학교와 주변 시설들 그리고 작품의 주요한 인물들과 조우하게 만드는 훌륭한 매신져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어느새 수수께끼를 풀어내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은 다음 편지와 편지를 보낸 호연의 정체를 갈망하게 된다. 


    세 번째 편지에서 일곱 번째 편지에 이르기까지 독자들은 소리와 함께 작품의 배경이 되는 청량 중학교의 장소들과 주변 인물들 그리고 소리의 학교 친구들을 함께 만나게 된다. 이 중 세 번째와 네 번째 편지를 통해 만나게 되는 동순은 호연의 편지를 함께 추적하는 친구이자 동료가 되는 인물인데, 동순은 다른 친구(승규)를 통해 받은 상처를 호연과의 관계로서 치유하게 된다. 아무 말 없이 떠나버린 호연에 대하여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던 중 자신에게 남긴 그의 편지를 보며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소리에 대한 연대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편지에서는 프랜시스 버넷(Frances Hodgson Burnett)의 <비밀의 화원 The Secret Garden>과 유사한 이야기 구성과 더불어 마치 인상주의 화가인 모네(Claude Monet)의 작품에서 차용한 듯한 연못 이미지가 펼쳐지는데 독자들은 아름다운 동화 속 풍경에서 진실에 한 걸음씩 다가가게 된다. 

 

   마냥 아름답고 흥미진진하게만 느껴졌던 이야기는 여덟 번째 편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과거 동순에게 트라우마를 제공했던 승규와의 사건을 통해 갈등 구조에 도달하게 된다. 소리는 여덟 번째 편지가 놓여 있어야 할 소각로에서 승규가 숨겨놓은 유출된 시험지를 찾게 되는데, 승규는 자신이 찾아낸 호연의 여덟 번째 편지와 시험지를 교환하자며 거래를 제안한다. 승규의 제안을 거부한 소리와 동순은 그 결과로 여덟 번째 편지의 내용을 볼 수 없게 된다. 더 이상 호연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된 두 사람, 여기에서 이들의 추적이 마감될 무렵, 동순은 결국 편지의 순서가 자신과 호연이 만난 장소들을 역행하여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즉 아홉 번째 편지를 찾는 단서는 자신과 호연의 만남의 연(緣) 속에 이미 주어져 있던 것임을 말이다. 결국, 그렇게 찾고자 하는 ‘연’이라는 대상은 극 중 호연이라는 직접적 인물인 동시에 작품의 제목이 암시하듯,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人緣)’ 그 자체를 지시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한편, 아홉 번째 편지를 확인한 동순은 소리에게 호연은 수술을 받으러 학교를 떠난 것이며 열 번째 편지가 (소리가 감기로 입원해있는) 청산병원의 옥상정원에 숨겨져 있음을 알려준다. 


   <연의 편지>는 마지막 편지인 열 번째 편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일종의 스토리의 전복을 시도한다. 즉, 호연이 남긴 편지들이 익명의 전학생을 향한 것이 아니라 과거 소리에게 받은 호의에 보답하기 위한 호연의 답장이었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이로부터 ‘인연(因緣)’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의미, 즉 ‘원인과 결과’로서 편지가 순환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듯 하다.) 독자들은 드디어 작품의 마지막 순간이자 진실의 장면에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비밀이 풀려감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화를 확인하는 손길을 주저하게 만든다. 작품 속 소리와 동순처럼 호연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젖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야기의 마지막이 슬픈 결말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그러한 주저함의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렇듯 설레는 작품이 끝나간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운 까닭일지도 모른다. 열 번째 편지에 들어있는 것은 ‘녹우역’으로 가는 기차표 2장. 소리와 동순은 떨리는 마음을 뒤로 한 채 기차에 오르게 되고 이윽고 역에 마중 나와 있는 (휠체어에 앉아있는) 호연을 만나게 된다.

 


   <연의 편지>는 이렇게 호연을 만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는다. 이 작품은 편지를 찾아가는 추리의 과정을 탄탄하게 만든 구성력이나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하는 작화력 뿐만 아니라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편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 미덕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종의 트라우마를 갖게 된 주인공들이 잃어버린 자신을 찾고 더 나아가 인연의 소중함을 알아간다는 점에서는 교훈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길지 않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무엇인가를 이 작품이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호연을 만난 이후의 전개 상황을 묘사하지 않은 작품의 구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작품을 마주하며 떠오르는 각자의 회상들에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품에 등장하는 편지라는 매개체는 이러한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현재의 세태와는 동떨어진 느리고 불편한 매체인 편지는 오히려 그러한 특성으로부터 우리의 오랜 기억을 회상하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추신. 

1. 작가는 단행본을 통해 극적으로 조우하게 된 소리와 동순, 호연의 후기를 선물처럼 전달한다. 우정과 사랑, 그 어딘가 즈음에 서 있는 반가운 세 사람을 만날 수 있다.
 
2. 작품 중반부에서 소개되는 이전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던 지민의 편지는 흔들리고 있는 소리를 붙잡아주는 한마디를 전한다. “고마워”. 아주 흔한 말이지만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한마디. 

3. 거꾸로 해도 마찬가지인 주인공의 이름 (이)소리. 전학 간 학교의 친구들은 소리의 외우기 쉬운 이름에 주목한다. 작품을 모두 감상하고 난 후, 주인공의 이름이 작품 전체의 구조와 닮아있음을 느꼈다면 너무 늦은 것일까.

 

 

* 본 원고는 한국콘텐트진흥원에서 주최한 '2019 만화평론 공모전'에 출품한 원고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