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준의 문화/예술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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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게임, 예술의 환경이 되다

yoo8965 2020. 1. 20. 03:23

William Higinbotham, <Tennis for Two>, 1958

 

세상을 바꾸는 게임, 예술의 환경이 되다
: 게임의 예술적, 사회-문화적 가치에 관한 짧은 보고서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을 때 바로 게임이 우리에게 할 일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게임을 ‘오락’이라 하고 삶의 빈 틈을 메우는 하찮은 수단으로 여긴다.
그러나 게임은 그보다 훨씬 큰 의미가 있다. 게임은 미래의 실마리다.
어쩌면 지금 진지하게 게임을 발전시키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책일지도 모른다.

 

- Bernard Suits, 『Philosophy of Science』, Vol. 34, No. 2,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7

 


  최초의 비디오 게임으로 알려져 있는 윌리엄 히긴보덤 (William Higinbotham)의 는 물리학자였던 그가 자신의 연구소(브룩헤븐 국립 연구소)를 찾아온 이들을 위해 개발한 전기적 신호를 계측하는 데 사용되었던 기계장치(5인치짜리 아날로그 오실로스코프)를 응용한 것이었다. 히긴보덤은 연구소 방문객들의 지루함을 달래줄 수 있는 장치로 이를 개발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게임은 과거의 놀이(문화)를 계승한 것이었으며 그렇기에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생산적이며 기능적인 목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후 게임은 기술적 발전을 통해 보다 조직적이며 구조적인 환경에서 거듭나고 있다. 다만, 그러한 게임을 발전시키는 요소로서의 기술의 발전은 필연적인 것이었고 언제나 게임은 기술과 문화, 우리의 생활방식에 의해 결정되는 하위 문화의 일환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기술이 게임을 선도하고 문화적 토양이 그것을 뒷받침하는 과거의 상황은 이제 옛 말이 된지 오래이다. 오히려 현재의 게임은 기술 선도와 문화적 토양 형성의 주요한 요인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변화의 주요한 요인으로 두 가지 지점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기술 발달에 의해 우리의 환경이 점차 기술적 차원의 것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상호작용적인 기술 미디어에 의해 구축된 미디어-환경은 과거의 일-방향적 미디어의 한계를 혁신적인 방식으로 변화시켰다. 대중들은 단순한 관객이 아닌 미디어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것을 선택하여 향유하는 문화의 주체로서 변모하였고 이러한 상황은 점차 그 속도를 높이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상호작용적 미디어 환경이 자연스럽게 대중들로 하여금 게임적 특성을 받아들이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시청자에 의해 이후의 전개가 결정되는 TV 속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놀랍지 않으며 직접 스크린과 접촉하여 내가 마음에 드는 콘텐츠를 소비하는 일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더 나아가 시청자 혹은 소비자가 콘텐츠의 주요 캐릭터를 설정하고 육성하는 수준에까지 도달하고 있는데, 이쯤 되면 현재 소비되고 있는 특정 콘텐츠들을 일종의 게임으로 봐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두 번째로 꼽을 수 있는 부분은 놀이, 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이다. 글 서두에 인용한 베르나르 슈츠의 언급은 과거 우리가 가졌던 놀이와 쉼에 대한 선입견에서 출발한다. 게임 역시 놀이에 대한 인식과 그 궤를 같이하는데, 핀란드 템페레 대학연구소의 프란스 마이라(Frans Mayra)는 디지털 게임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원인으로 대중문화의 위계질서에서 낮은 지위를 차지하는 게임의 사회적 위상 문제를 언급한다. 또한 <비디오 게임>의 저자인 제임스 뉴먼(James Newman) 역시 유사한 의견을 피력하는데, 그는 비디오 게임이 학계, 특히 미디어와 문화 연구 분야의 학자들에게 무시되었다고 주장하며 그러한 이유로 첫째, 비디오 게임을 어린이들의 미디어로 생각하며 둘째, 비디오 게임을 전통적인 미디어들의 중요성, 경건함 혹은 진실성을 가지지 못한 시시한 저급예술로 생각한다는 것이다.(1) 따라서 게임을 위험한 대상으로 인식하는 사회적 함의가 도출된다. ‘게임이 단순하고 자극적인 ‘쾌락’에만 집중한다’라는 피하기 어려운 지적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결코 무조건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는 사항이다. 결국 게임은 매우 엄격한 상업적 전략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다수이기 때문에, 플레이어들이 자신들의 의지로서 게임을 선택하고 몰입하기 위해서는 보다 자극적인 요소들이 활용될 수 밖에 없다. 이는 게임이 지닌 상호작용적 속성 및 현실적인 피드백 시스템 등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에도 불구하고 현재 의미 있는 숫자의 대안 게임들이 등장하고 있다. 최근의 게임 개발자 콘퍼런스에서는 게임 개발자들이 현실을 재창조하기 위한 게임에 관하여 접근해오고 있는데, 가령 ‘개인과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는 게임’,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게임’, ‘사회 현실 게임 Social reality game’, ‘기능성 게임 serious game’ 등의 주제들이 점차 소개되고 있는 상황이다.(2) 이러한 노력 덕택인지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 국내의 경우 ‘셧 다운제 (2011년)’(3)와 게임시간 선택제 (2012년)(4) 등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시행되었던 제도나 게임 과몰입에 관한 우려 덕택에 게임의 순기능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의 폭이 넓지 않지만, 그럼에도 교육적 게임이나 기능적 게임이 등장하고 있으며 앞서 첫 번째 이유에서도 서술한 것처럼 모든 기술 미디어의 형태의 게임적 요소에 기인하여 점차 게임이 중요한 문화적 콘텐츠로 자리잡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최근 우리 사회를 관통했던 ‘웰빙’이나 ‘힐링’ 등의 키워드를 통해서도 놀이 및 쉼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변화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Maurice Benayoun, <World Skin>, 1997


   그렇다면 게임이 제공하는 예술적 효과는 어떠할까? 게임을 예술의 형태 혹은 환경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이에 관하여 미국의 저명한 영화비평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로저 에버트(Roger Ebert)는 2005년 다소 공격적인 제목의 아티클 “비디오 게임들은 절대로 예술이 될 수 없다 Video games can never be art”를 발표했다.(5) 그의 논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술은 규칙들과 점수, 목적 그리고 결과에 상관없이 경험하는 것인데 반하여 게임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한 아무리 그래픽이 뛰어나고, 철학적인 이야기가 있는 게임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 이유 자체가 '이기는 것(Win)'이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에버트의 이러한 주장은 다양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비판의 주요한 논지를 살펴보면 그가 경험한 게임의 경우 과거의 아케이드 게임에 국한되어 있으며, 단순한 승패가 아닌 과정에서 획득되는 미적 경험이 중요한 게임 또한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또한 게임이라는 장르에서 특화되는 특성에 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았다는 점도 주요한 비판의 요소인데, 제임스 뉴먼은 여타 다른 미디어들이 몸에 새겨지는 방식과 게임이 몸에 새겨지는 방식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주장하며 게임이 단순한 경험을 넘어 ‘체험’의 차원에서 인식되어야 함을 지적하며 이를 ‘운동감각적(kinesthetic)’이라 표현한다.(6) 현대 예술에서 게임을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가상적 환경이며, 상호작용적인 특성에 기반한다. 따라서 기존의 수동적 관객은 직접 참여하여 ‘운동감각적’으로 작품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게임이라는 장르 자체가 예술과 같은 의미로 이해될 필요는 없겠지만, 현대 예술이 강조하는 몰입과 체험, 참여 등의 요소는 게임을 통해 충실히 구현될 수 있다. 

 

문준용, <확장된 그림자 #2>, 2018


   모리스 베나윤(Maurice Benayoun)의 작품 <세계의 피부 World Skin>는 마치 가상현실 게임을 하는 듯한 환경을 제공한다. 관객들은 사방이 영상으로 구성된 케이브(Cave)로 진입하여 마치 전쟁터와 같은 이미지 환경에 노출되는데, 상대방을 제거해야만 하는 게임과는 다르게 오히려 관객들은 종군 기자가 된 것처럼 총이 아닌 사진기를 들고 전쟁터를 헤메이게 된다. 관객들은 전쟁터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자신이 마주한 장면들을 촬영하게 되는데, 흥미로운 부분은 관객이 포커싱을 맞춰 촬영한 지점이 화면에서 빈 공백으로 처리된다는 점이다. 마치 서로의 존재를 말살시키는 전쟁의 본 모습을 투영하는 듯 보이는 이러한 장치는 게임적 환경으로 구성된 이 작품이 왜 예술 장르에서 소개되고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반면 ‘광주미디어아트페스티벌 2018’ 출품작인 문준용의 <확장된 그림자 #2>의 경우, 최근의 증강현실 기술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작품이다. 손전등을 들고 축소화된 도시의 모습처럼 보이는 오브제들을 비추면 실제 빛이 아닌 가상의 빛에 의해 만들어지는 도시의 그림자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림자로 비추어진 도시 속에는 가상의 아바타들이 살고 있는데, 관객들이 자신들을 향해 손전들을 비추면 친절하게 손을 흔들어주기도 한다. 이 작품은 실제와 가상이 미묘하게 중첩되어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실제로도 빛이 나오는 손전등과 같은 리모콘은 사실 센서에 의해 작동되어 가상적 이미지를 포착하게 하는 포인터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관객들은 자신들에 의해 만들어진 실제 빛과 가상의 이미지 사이에서 약간의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예술에 있어서 게임적 환경은 위의 사례들처럼 적극적으로 관객들을 작품 속의 환경으로 초대한다. 다수의 미디어아티스트들이 게임 엔진을 이용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적인 속성을 통해 보다 몰입적인 환경을 제공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다만 게임과 예술은 궁극적인 목적에 있어 여전히 차이를 보인다. 게임이 플레이어들에게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 속에서 즐거움을 제공하고자 한다면, (게임) 예술은 오히려 플레이어로 하여금 가상 현실로부터 우리가 마주하는 실제 세계를 사유하게 만든다. 이러한 구도는 기술을 활용한 예술 작품 전반에 걸쳐있는 메시지 구조이기도 한데, 기술 자체를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사용되는 기술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마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게임은 이제 우리의 문화 사회 그리고 예술 환경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키워드로 작동한다. 

 

1) 제임스 뉴먼, 박근서 외 역, 『비디오게임』, 커뮤니케이션 북스, 2007, pp. 7-8 참조. 
2) 제인 맥고니걸, 『누구나 게임을 한다』, 알에이치코리아, 2011, 28p 
3) 청소년의 인터넷 게임 중독을 예방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로 신데렐라법이라고도 한다. 2011년 5월 19일 도입된 청소년보호법 개정안에 따라 신설된 조항(26조)으로, 2011년 11월 20일부터 시행되었다. 계도 기간을 거쳐 2012년부터 단속을 실시하고 있으며, 주무부처는 여성가족부이다. 2014년 4월 위헌 확인 청구에 대해 헌법재판소에서 합헌 결정을 내렸다.
4) 만 18세 미만인 게임 이용자 부모나 법정대리인이 원할 경우 해당 이용자가 특정 시간에 게임에 접속하는 것을 게임업체가 의무적으로 차단하도록 한 제도를 말한다. 게임산업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 도입되었으며, 2012년 1월 22일 발효됨에 따라 6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쳐 7월부터 적용되었다.
5) Roger Ebert, 'Video games can never be art', Chicago Sun-Times, 2010                    http://blogs.suntimes.com/ebert/2010/04/video_games_can_never_be_art.html
 6) 제임스 뉴먼, 같은 책, p. 136. 

 

2018년 12월 전자신문 기고글.

http://www.etnews.com/20181206000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