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준의 문화/예술 비평

전형산 / 듣.보.잡(음)을 위한 변명들 본문

Arts & Artists

전형산 / 듣.보.잡(음)을 위한 변명들

yoo8965 2019. 12. 17. 18:40

듣.보.잡(음)을 위한 변명들 : 전형산 작가 개인전 <잔향시간>


0.
최근 넷 상에서 젊은 세대들에게 자주 사용되는 ‘듣.보.(잡)’이란 용어가 있다. 풀이하자면 ‘듣도(듣지도)’, ‘보도(보지도)’ 못한 ‘무언가(이하, ‘잡’ 설명 생략)’란 것인데, 그만큼 존재감이 없는 혹은 존재하는지도 몰랐는데 갑자기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것 (혹은 사람)들을 설명할 때 사용된다. 우스갯소리로 사용되는 용어인지라 이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도 우습지만,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그 뜻풀이를 곰씹게 되곤 하는데 아마도 이와 같은 시대적 조어들이 대중의 혹은 현실의 인식을 적확하게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듣보잡’은 말 그대로 현실에서의 존재성의 조건으로 가시/가청 영역에서의 일종의 사건을 전제한다. 즉, ‘들리거나’, ‘보여야’ 그 인물(혹은 사물)이 ‘잡놈(것)’이 되지 않는 필요충분조건이 되는 셈인데,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으면 그 존재를 잡스러운 것으로 치부하는 우리의 보편적 인식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이 용어는 당연하게도 ‘듣고 보는 주체가 누구인가?’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흔히 이 용어를 사용할 때, 용어의 수용자가 누군가에게는 그야말로 ‘듣보잡’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통해 종종 설왕설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보통 여기서의 ‘주체’는 일반적인 대중들의 시각을 지칭하지만 대중이라는 무리에 자신의 몸을 숨기는 관습적이고 편견어린 우리의 시각이 깃들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1. 
프리들랜더(Friedlaender)의 단편소설 「괴테가 축음기로 말한다 (Goethe's phonographed speech)」에서는 더 이상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죽은 괴테의 흔적을 추적하는 교수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교수는 괴테의 생전의 육성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소녀를 위해 괴테의 두개골에서 후두부를 복원하여 축음기에 연결한다. 그는 “괴테가 말할 때마다 그 목소리가 진동을 유발했다면, 그 반향이 시간이 흐르면서 약해진다고 해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추론하며 여태까지 말해진 모든 담론의 잡음에서 괴테의 말을 각인한 음향 패턴을 추출하고 당시의 음향 증폭 기술을 이용해서 이 패턴을 다시 소리로 되돌리려 한다. 이 이야기는 소리의 정체가 결국 진동이란 과학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무엇이지만, 과거에 그것이 소리의 형태로 존재했다면 분명 현재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학적 사실은 현재, 일반적 상식이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소리를 매개하는 매개체에 관한 현상적 접근으로만 그것을 이해하려 한다. 따라서 그것이 음악이나 인지하기 쉬운 발음체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을 경시하거나 없는 듯 치부한다. 즉, 위의 맥락에 대입해보자면, 그야말로 ‘듣.보.잡(음)’이다. 

2. 
‘잔향(殘響, Reverberation)’은 발음체에서 내는 소리가 울리다가 그친 후에도 남아서 들리는 소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위의 듣.보.잡(음) 공식에 완벽히 부합하는 소리이다. 다만, 이제 우리는 특정 대상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거나 가청 영역에서 확인하기 어려운 것들이라 할지라도 명백하게 실재하며 어떤 사건을 계기로 보이고 들리는 상태로 전환될 수 있는 매우 유연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굳이 현실적 사건으로 나타나지 않은 잠재적 상태라 할지라도 그것은 과학적으로 혹은 철학적으로도 이미 우리 주변에 실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는 작가의 작품에 접근하기 위한 기본적 토대가 된다. 전형산은 ‘비음악적 소리’를 소재로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는데, 여기서의 ‘비음악적 소리’는 (물론 의미상으로는 보다 큰 범주를 지니겠지만) 결국 듣도 보도 못한 소리로 귀결된다. 모든 소리가 음악일 수 없다는 매우 상식적인 (비음악적 소리의) 도식을 거꾸로 뒤집어보면, 음악이 아닌 모든 소리를 그 자체로 경험할 수 있는 예술적 경험의 장에 도달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듣보잡(음)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따라서 ‘잔존해있는 소리가 머무르는 시간’의 의미로 해석되는 전시의 제목 ’잔향시간’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소리(진동)가 시간과 공간의 궤적에 연동하여 그 자체로의 흔적을 드러내거나 또 다시 소멸해버리는 일종의 소리의 여정을 담은 이야기가 된다. 

3. 
작가는 전시장에 ‘잡스러운’ 것들을 정성스럽게 모아놓는다. 그의 아티스트로서의 장점이 발휘되는 또 하나의 순간이 이러한 잡스러운 것들?의 조합을 꽤나 근사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는 오래된 아날로그 기계 장치들을 본래의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재전용하여 사용한다. 금번 전시에서도 이러한 특성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전시장에는 만물상이나 철물점에서 한번쯤 스쳐지나갔던 다양한 종류의 오브제들이 이상-야릇한 조합을 통해 설치되어 있는데 어떠한 측면에서 이러한 설치 전경은 이미 전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즉, 시간의 경과에 의해 (혹은 공간적 이동에 의해) 기존의 기능적 의미가 퇴색되어버린 기계 장치들은 이미 주변화 되어버린 의미 체계로서의 유형을 보여준다. 전시를 구성하는 각각의 작품들이 서로 다른 이야기 구조를 담고 있음에도 하나의 줄기로 귀결되는 까닭은 전시 작품들이 제시하고 있는 이러한 매체의 재발명(reinventing)에 기인한다. 

 

불신의 유예 #1; void /  Suspension of Disbelief #1; Void Mixed media , sound installation (motor, speakers, AMP, scanner, printer, monitor, cam, sound module,…) 140×60×180cm ,  2018


전시는 크게 <불신의 유예> 시리즈와 개별 작품인 <4개의 작은 타자들>, <소멸되지 못한 말>로 구성된다. 사실, 전시의 소재나 주제가 접근하기 쉽지 않은 성질의 것인데 작품들의 제목 역시 다소 난해하다. 우선 전시장에 들어서게 되면 마주하게 되는 작품이자 이번 전시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시리즈물인 <불신의 유예 #1; void>를 살펴보자. 마치 거대한 재봉틀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일종의 악기처럼 기능한다. 작품에 설치된 카메라는 위-아래로 이동하며 작품 전면의 장면을 이미지로 스캔한다. 또한 이러한 작동은 그것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모니터와 연동되고 있는데 이미지를 사운드로 변환시키는 작품의 주요한 작동 방식은 이러한 기계 장치의 작동 속으로 숨어버린다. 흥미로운 부분은 마치 악보처럼 읽혀진 모니터상의 이미지가 출력되어 전시장 바닥에 깔리게 되는 지점인데, 관람객들이 이러한 (외형적) 장치들에 현혹되는 순간, 작품은 그러한 광경으로부터 파생된 노이즈음을 지속적으로 노출한다. 

 

불신의 유예 #3; contact / Suspension of Disbelief #3; contact Sound installation, mixed media dimension variable, 2018


4. 
작가가 도전하는 지점은 소리를 매개로 하여 의미화되는 이분법적 세계의 해체이다. 보통 이러한 시도는 비가시적 영역이 존재함을 다른 감각을 이용하여 증명하거나 들리지 않는 비-가청 영역에 존재하는 음의 흔적을 추적하는 태도로부터 나타나는데, 전시장 안쪽에서 마주하게 되는 <소멸되지 못한 말>과 지하에 설치되어 있는 <불신의 유예#3; contact>는 이러한 작가의 방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소멸되지 못한 말>의 경우 관람자 혹은 전시장에서 발생된 소리를 턴테이블 위의 원형 레코드판에 각인하는 작업인데, 우리가 과거 경험했던 턴테이블을 이용한 소리 (혹은 음악)의 청취 과정이 거꾸로 나타난다. 즉, 여기서의 턴테이블은 소리를 발생시키는 재생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모아두는 기록 장치에 가깝다. 더군다나 소리를 듣고 인식하는 순간 더 이상의 소리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우리와는 달리 이 장치는 충실하게 공간 속으로 그리고 시간 속으로 소멸해버리는 소리의 흔적을 시각화한다. 듣도 보도 못한 소리들이 나름의 흔적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특정 소리가 발생한 이후 그 소리가 필연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마주하게 됨을 상기해보자면 잔여물로서 남아있는 잔향의 존재 유무는 오롯이 시간에 의존한다. 한편 <불신의 유예#3; contact>는 시간을 넘어 공감각적으로 확장되는 소리에 대한 감각의 세계를 일깨우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번쩍거리는 6개의 안테나를 통해 우리의 인지 감도를 초월하는 주파수들을 수집하며 중앙의 회전하는 원통을 통해 이를 다시 해체하고 재조합하여 관객들에게 돌려보낸다. 이 작품에서 우선적으로 드러나는 혹은 이용되는 감각이 시각과 청각이라면 그것이 다시 돌아오는 과정은 매우 촉각적으로 진행되는데, 공간 전체를 관통하여 울려 퍼지는 소리의 시-공간적 궤적이 피부에 달라붙는다. 

 

불신의 유예 #2; tremor  /Suspension of Disbelief #2; tremor, Sound installation, mixed media, dimension variable, 2018


5. 
이야기의 마지막 조각은 <불신의 유예#5; dismal>에서 완성된다. 이 작품은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소리에 주목해야 하는 작품이다. 마치 사람의 말(언어)처럼 들리는 작품의 사운드는 가까이가면 갈수록 양 쪽의 스피커를 오가며 마치 돌림노래의 후렴구처럼 멀어지게 된다. 소리의 정체를 (음성) 언어로 확신한 관객들이 그 사운드에 접근하고 해독하려 하지만 결국 그 의미에는 도달하지 못하는데, 여기서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미화되지 못한 소리’, 즉 사라지지 못한 채 남아버린 ‘잉여의 소리’가 발생한다. 소리가 그 자체로 의미가 되며 들리고 보이는 것이 일종의 팩트처럼 인식되는 현실의 순간들은 맥없이 그 자리를 듣(지도) 보(지도) 못한 무엇에게로 넘겨주게 된다. 현상학자인 메를로 퐁티(Merleau Ponty)는 ‘어떤 의미에서 의미(의의)는 언제나 간격(écart)’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언급은 오히려 의미에 얽매여있는 우리를 반추하게 만든다. 무의식적인 차원 혹은 의식적 차원의 비의도적 간격에서도 철저하게 그것의 기의에 도달하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은 듣도 보도 못한 잡.소리에 의해 해체된다. 아주 철저하게. 

 

* 2018 전형산 작가 개인전 <잔향시간> 서문 중

 

전형산 작가 웹페이지 : http://junhyoungsan.cafe24.com/

전시 소개 페이지 : http://junhyoungsan.cafe24.com/?p=670

 

전형산 개인전 2018/06/29-07/28 @인사미술공간 – JUN, HYOUNG SAN

전시일시 2018-06-29 ~ 2018-07-28 오프닝 2018-06-29(금) 오후 6시 장소 인사미술공간 (서울 종로구 창덕궁길 89) 작가 전형산 관람료 : 무료 부대행사 사운드 퍼포먼스 6.29 (금) 오후 6시, 작가와의 대화 7.14 (토) 오후 3시 주관 인사미술공간,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주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의 02-760-4721~3, ias.info@arko.or.kr <잔향시간>은 소리 자체의 해체와 결합 그리고 그 소리의 이동을

junhyoungsan.cafe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