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준의 문화/예술 비평

정연두 <Blind Perspective> / 시-공간의 중첩이 가능해지는 마법과 같은 순간 본문

Arts & Artists

정연두 <Blind Perspective> / 시-공간의 중첩이 가능해지는 마법과 같은 순간

yoo8965 2019. 12. 9. 20:49

Blind Perspective, 2014


“가상현실은 ‘궁긍적인 공감 기계’이다. 이를 통한 경험들은 다큐멘터리보다 더욱 진하다.  

Virtual reality is the 'ultimate empathy machine.' These experiences are more than documentaries” 

_Chris Milk 


   정연두의 는 2014년 아트타워 미토(Art Tower Mito)에서의 개인전 “Just like the road across the world”에서 공개된 작품으로 원전으로 폐허가 된 미토 지역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작가는 실제 마을을 돌아다니며 16톤 가량의 각종 폐기물들(부숴진 욕조, 멈춰버린 시계 등)을 전시장의 33m 가량의 복도를 제작하여 설치해 놓았다. 관람객들은 이러한 폐기물들이 늘어서 있는 복도를 ‘오큘러스 리프트(Oculus Rift)'라는 VR 장치를 착용하고 걸어가게 된다. 실제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은 폐허가 된 마을의 잔해들을 헤쳐나가며 길을 걸어가지만, VR 장치 속에서는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이 작품은 매우 적극적으로 VR이 지닌 미덕을 활용한다. 마치 마법처럼 현실의 한계를 벗어나 존재하지 않는 또한 존재할 수 없는 순간들을 관객들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상현실이 제공하는 이미지들은 본질적으로 현실과의 괴리를 전제한 아주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한때 이곳의 모습이었고, 앞으로 다시금 마주하게 될 미래의 장면일수도 있다. 즉, VR은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상향으로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결국 이러한 이상향은 현실 세계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을 투사하는 잠재체로서의 기능이 발현된다. 실제로 정연두는 VR 속에서의 자연 풍경의 모습을 200km정도 떨어진 아키타현(AKITA: 秋田県)을 일주일 동안 돌아다니면서 촬영한 실제 풍경을 바탕으로 작업한 이미지들로 채워 넣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미토 지역의 마을과 타 지역의 마을 이미지를 병치시키며 가상현실 이미지들을 통해 양립할 수 없는 과거와 현재, 폐허가 된 마을과 현재의 아키타현의 마을을 공존시킨다. 

   또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요한 오브제들은 피해를 입은 마을의 시간성을 고스란히 내재한다. 특히 마을 회관의 시계는 해일이 들이닥친 바로 그 시간에 멈추어져 있기 때문에 전시장의 작품 환경이 미토 마을의 과거의 특정 시점을 재구성함을 명확히 드러낸다. 관객은 과거의 한 시점에 멈추어져 있는 설치 환경에서 가상현실 장치를 쓰고 또 다른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장치들은 관람객들의 현재적 감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작가는 이러한 시-공간의 겹침을 통해 관람객 및 미토 마을의 주민들로 하여금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의 현재를 재구성하게 만든다. 현재의 미토 마을은 과거의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실제적 상황에 놓여있지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과거 마을의 아름다운 모습은 정연두의 작품을 통해 현실과 마주한다. 마치 마법과 같은 이중적 실재로서 말이다. 

VR 헤드셋 내부 이미지, 2014


2017년 10월 퍼블릭아트(Public Art) 기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