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준의 문화/예술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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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에서 무빙이미지로 : 이미지의 삶과 죽음

yoo8965 2019. 12. 8. 01:40

Arnold Boecklin, <Island of the Dead>, 1907

   프랑스의 철학자 레지스 드브레(Régis Debray)는 자신의 저서 ‘이미지의 삶과 죽음(VIE ET MORT DE L'IMAGE, 1992)’에서 이미지가 어떻게 우리 사회를 결속시키며 동시에 파괴시키는지를 분석한다. 이는 강력한 이미지의 시대가 되어버린 현재의 상황을 보며 이미지의 기원으로부터 그 동인을 탐구해보려는 저자의 매개론적 방법론이 투영된 것으로 평가된다. 이미지는 과거로부터 현실 재현을 위한 매개체였다. 동굴 벽화 시기에서부터 이미지는 현실을 기록하거나 전달하기 위한 도구였고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상상력을 현실로 구체화시키는 현실 재현을 위한 환경 자체였다. 인간은 이미지를 통해 자신만의 이미지-세계를 구현하였고 그러한 세계는 결국 우리가 경험했던 순간의 재현이자 꿈꾸어왔던 환상에 대한 일루젼으로 나타났다.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로서 우리 세계의 가상성에 대한 현상학적 질문을 던져놓았다면, 이미지가 그러한 세계의 환영을 현실 세계 속에서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이미지의 어원이 죽은 이의 얼굴을 가리는 즉 현실에서의 사자(死者)의 부재를 가리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이미지에 관한 본질적 의미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이에 따르면 결국 이미지는 본질적으로 가상적인 무엇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가상(假象, Schein, Virtual)'이라는 형용사를 실재하지 않는 무엇 혹은 특정 상황 등을 설명할 때 사용하거나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재현해보는 '모의실험(Simulation)'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상 개념의 일상적 활용은 현실과의 일정 거리를 전제하고 있다. 즉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미래에 일어날 수 있으며 실재하지 않는 무언가'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러나 가상의 개념은 현실과 대비되는 것이 아니다.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는 가상적이라는 말을 '아직 현실이 되지 않은 그러나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 들뢰즈(Delueze)나 피에르 레비(Pierre Levy)와 같은 현대 철학자들 또한 가상의 개념을 현실의 잠재태 개념으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이미지를 결국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가상적 무엇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그 한계가 오히려 분명해진다. 다시금 이미지는 실존적인 그리고 현실의 재현이라는 역할과 의무에서 벗어나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현실에서의 잠재적 존재 가능성을 획득하게 된다. 한 때, 사진이라는 기계적 이미지는 현실과 이미지의 관계를 결정짓는 듯 했다. 정밀하게 현실을 반영하는 사진-이미지는 강력한 현실 재현성을 바탕으로 '사진=현실'이라는 등식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이러한 현실과 이미지의 관계에 새로운 흐름을 제시하였다. 디지털은 매체의 근본적 구조를 변화시켰으며 현실을 직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과 가까운 이미지인 사진 이미지조차도 과거의 굳건한 믿음으로부터 벗어나 일종의 가상적 이미지 세계임이 드러났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미지의 잠재적 현실 조작 가능성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의 현실 조작 가능성은 역설적으로 이미지가 그 자체로 현실로서 인식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러한 이미지의 현-존재로서의 가능성은 디지털 이미지의 등장으로 가속화되었다. 디지털 이미지는 숫자의 조작을 통해 사진적 이미지의 특성, 즉 사실적인 현실성을 기반으로 현실과 유사한 가상 세계를 창조하였다. 과거, 현실로 인식되는 이미지는 사진이 만들어낸 기계적 이미지를 의식한 하이퍼-리얼리즘에 와서야 완성되었다. 그러나 하이퍼리얼리즘은 현실처럼 정밀하되,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미지를 구현했다. 디지털 이미지는 이와 같은 하이퍼 리얼리즘의 전략을 충실히 따르며 예술사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된 재현의 문제를 예술에서 분리시켜 상업적 시장에 풀어놓았다. 

   그러나 디지털 이미지의 딜레마는 의외의 순간에서 드러난다. 디지털 이미지는 그것이 지닌 본질적 특성을 발현시키기 보다는 아날로그적 현상으로 제한시켜야 하는 당위를 가진다. 즉, 디지털의 특성 자체가 현실과는 무관한 숫자의 세계이고 무제한으로 확장될 수 있는 시지각의 세계일터인데, 우리가 디지털에게 요구하는 이미지는 결국 현실적 세계로서의 인식 가능성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하이퍼 리얼리즘이 현실처럼 보이되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순간을 묘사했다면, 디지털 이미지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가상의 환경을 구축하되 현실성이 느껴져야 한다. 가령,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통해 현실을 넘어선 환상적인 가상 이미지를 창조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는 인간인지라, 스스로가 경험해 온 현실의 범주 안에서만 이미지로의 몰입을 시도한다. 드브레가 책에서 표현한대로, ‘마술 magic’과 ‘이미지 image’는 같은 철자로 구성되어 있다. 과거, 이미지가 마술과 같은 놀라운 사건으로 발현했던 시기에 그 생명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현재의 이미지는 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 디지털이라는 첨단 기술의 놀라운 파급력과 무빙-이미지라는 생생한 전달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미지는 현실이라는 자신의 모체를 향한 재현의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백남준 미술관 강의 노트 중,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