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준의 문화/예술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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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의 혁신, 새로운 전위 예술의 탄생

yoo8965 2019. 12. 8. 01:23

Edwin van der Heide, <LSP>, 2006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학자인 이합 하산(Ihab Hassan)은 20세기에 이르러 과학기술적 의식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발생했으며, 이러한 탄생을 위해 컴퓨터를 비롯하여 우리가 소유한 다양한 매체가 기여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그의 이러한 평가는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의식 수준이 모더니즘적 절대성에서 보다 초월적이고 복합적인 형태로 변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예술 또한 이러한 변화에 있어 예외는 아니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넘어 뉴미디어 시대로 접어들면서 예술은 스스로의 존재를 가변적이고 다원적 형태로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로부터 예술은 자신의 개념을 직접적 감각으로 표출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매체의 표현 능력을 확대시켜 왔다. 그러나 최근 예술은 그러한 매체, 특히 새로운 기술-매체들을 좀 더 적극적 형태로 활용하여 자신의 경계를 확장한다. 현대 예술은 더 이상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인간의 행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보다 폭넓은 대상에 관한 연구와 심도 깊은 주제에 주목하고 있다. 따라서 예술이 매체를 활용하여 자신의 전위적 특성을 강화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와 연동하여 적극적인 기술 매체의 사용이 장구한 역사를 거쳐 구축된 예술의 개념마저 위협하고 있지만 이러한 위협을 최근에 와서야 두드러지는 경향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모더니즘은 문화 사회적 측면에서 기술을 심미화하려는 경향을 보였고 소비에트 구성주의, 데 스타일과 바우하우스에 이르는 다양한 아방가르드 운동의 작업과 선언에서 이러한 기술주의적 경향은 선명하게 드러났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르네상스 시기에서부터 예술과 과학의 공유 지점에 관한 실험들이 있어 왔으며 테크놀로지가 예술이 지닌 주술적이고도 마법적인 장막을 제거하는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었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예술에 있어 매체 사용에 관한 당위성과 기능성을 입증하는 뒤늦은 항변은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현 시점에서 예술이 취해야 하는 기술-매체에 관한 입장을 재-고찰 해보고자 한다.


새로운 기술 매체와 예술 

   흔히들, 예술가는 시대의 통념과 절연(絶緣)하여 정신의 내적 필연성에 따름으로써 다음 시대를 창조해낸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반문해보자. 시대를 반영하지 않는 예술이, 또한 예술가가 다음 시대를 예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시대의 통념을 전제하지 않는 예술이 그 사회를 온전하게 반영하는 거울이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위의 언급은 해당 시기의 피상적 측면이 아닌 내재적인 원칙에 주목하고자 하는 예술의 당위를 설명한 것이리라. 그러나 문제는 현 시대가 과학 기술에 의해 촉발된 새로운 매체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존 예술이 중시했던 원본으로부터의 ‘지금’, ‘여기’와 같은 개념은 해체되고 새로운 공간에서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고 있다. 빌렘 플루서는 ‘디지털 코드로서 탄생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새로운 공간 및 시간 경험이다. 그것은 새로운 패러다임과 마찬가지로 모든 종래의 경험들을 부정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과거로부터 새로운 기술이 나타날 때마다 세상은 변화해 왔다. 철도는 기존 시-공간에 관한 인식을 바꾸어버렸고, 사진은 복제의 기능으로부터 예술이 지닌 원본성과 아우라의 개념을 소급시켰다. 자연스럽게 각 시대의 예술도 그와 동기화된 감성과 행위를 발생시켰는데 큐비즘은 사진 기술에 조응하여 사실적 회화공간을 파괴하고 대상을 파편화시켰으며 비디오아트는 미술의 시간적-공간적 한계를 광활하게 터놓았다. 특히 플루서의 언급처럼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종전의 예술 개념들을 근본적 차원에서 변화시키고 있다. 과거로부터 기술이 아무리 혁신적인 개념을 가지고 종래의 예술 개념들을 변화시켜 왔더라도 그것은 물질적 형태의 한계 안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이러한 물질적 형태를 디지털적 가상의 숫자 정보로 환원시켰다. 예술은 더 이상 물리적 환경 속에서만 구현되고 기능하는 개념에서 비물질적 환경, 즉 가상적 상황 속에서도 인식이 가능한 비물질적 그 무엇이 되어가고 있다.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지적처럼, 광학적 복제 기술들은 종전의 예술 작품이 가지고 있던 원본성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으며 디지털 복제 기술들은 원본의 개념 자체를 파괴시켰다. 예술이 정보로 구성된다면 그것은 두 가지의 차원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기존의 모든 물질에 대한 원소의 치환적 차원에서이다. 디지털은 결국, 0과 1이라는 숫자 정보이다. 우리가 이러한 2가지 숫자로 모든 것을 변환시키는 이유는 결국 우리가 만들어낸 컴퓨터와 같은 기계 문명이 이러한 정보를 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동력이 이러한 기계 문명으로 대체되면서 우리는 주변의 모든 물질적 정보를 비물질적 숫자 체계 속에서 헤아리게 되었다. 예술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예술 작품은 점점 더 비물질적 정보 체계에서 생산되고 유통된다. 현대 예술에서 점점 더 그 위상을 확대하고 있는 뉴 미디어아트를 살펴보면 근본적 형식에서부터 비물질적 정보 체계, 즉 디지털로 구성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1960년대부터 시작된 알고리즘 아트와 같은 시도들은 정보를 예술 작품의 근본 요소로서 차용한 사례들이다. ‘알고리즘 아트(Algorithmic Art)’는 1960년대 경부터 시작되었는데, 주로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절차나 방법을 의미하는 알고리즘을 예술에 활용한 것이다. 주로 컴퓨터에서 사용되던 명백한 규칙들의 집합인 알고리즘을 몇몇 수학자 및 예술가들이 예술에 적용하면서 새로운 컴퓨터 예술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Henry Rousseau, (1897)와 Charles Csuri의 작품 (헨리 루소의 ‘잠자는 짚시’의 알고리즘 버전)

   알고리즘 아트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과정에서 나타난 오류와 같은 의외의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디지털 컴퓨터를 처음부터 예술의 창조에 사용할 가능성을 탐구한 작가 마이클 놀(Michael Noll)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1961년부터 벨 실험실에서 연구생으로 근무한 그는 동료의 프로그래밍 오류로 발생한 ‘버그’의 괴상한 기호로부터 새로운 예술을 제작하였다. 당시 그가 예측한 미래 예술/예술가의 모습은 현재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사뭇 의미심장하다.


“아직까지는 수단이 결과물보다 더 큰 중요성을 갖는다 ....  미래가 어떻게 되든 
‐ 과학자들은 거의 모든 종류의 회화도 컴퓨터로 생성해낼 수 있는 시대를 예견하고 있다 ‐ 
예술가의 실체적 터치는 더 이상 예술작품을 만드는 데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내맡겨질 것이다. 
매체 혹은 기법과 작화의 메카닉으로부터 해방되어, 예술가들은 그저 ‘창조’만 할 것이다.”

- Michael Noll

마이클 놀은 예술가와 프로그래머가 한 인격 안에 결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컴퓨터 알고리즘을 통해 일종의 패턴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으로부터 예술과의 접점을 만들어갔다. 이러한 흐름은 스스로를 ‘알고리스트(Algorist)’라 명명하며 과거의 예술 작품을 알고리즘을 활용하여 새로운 예술로 탄생시킨 찰스 수리(Charles Csuri)의 작업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활용하여 당시 회화적으로는 불가능했던 해체적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새로운 전위예술, 뉴 미디어아트

Marcel Duchamp, <Fountain>, 1917

   시대별 전위예술, 즉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항상 존재해왔다. 아방가르드는 단순히 20세기 초의 예술 운동만이 아니라 동시대 예술 흐름을 넘어 다음 세대의 예술을 준비하는 움직임으로서 존재하여 왔다. 다만 생각해 볼 측면은 1900년대 이후의 아방가르드에게 있어 예술과 과학 기술의 관계는 그 위상과 비중을 달리하며 항상 문제의 중심 주변에 머물러 왔다는 사실이다. 들뢰즈는 ‘새로운 사유와 개념이 창출되기 위해서는 상상력 혹은 감성이 개념에 종속되어서는 안된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예술이 취한 전략들을 살펴보면 스스로의 개념 종속을 피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 매체들을 적절히 사용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술가들은 전통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내용에 따라 다양한 매체를 도구적 수준에서 활용하였다. 이러한 매체의 도구적 개념은 입체주의와 뒤샹에 이르러 오브제(매체) 자체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피카소(Picasso)는 그의 종합적 큐비즘 시대에 실제 오브제를 캔버스에 붙여 그 자체를 작품의 주요한 주제로 제시하였으며 뒤샹(Duchmp)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생활 용품(변기)을 예술 환경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전통적 매체의 도구적 속성에 대한 전면적 부정은 러시아의 전위 예술가들에 의해 정의된 ‘팍투라(Factura)’ 개념에서 나타난다. 팍투라란 재료 자체가 본래 가지고 있는 성질의 실현, 제작 과정 중 재료의 특수한 조건과 그 재료의 변모를 의미한다. 즉 팍투라는 재료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성질을 손상하지 않고 완전히 살려낸다는 재료의 전체성(Integrity of Material)을 의미한다. 말레비치(Malevitch)의 아르키텍톤, 타틀린(Tatlin)의 레타틀린, 엘 리시츠키(El Lissitzky)의 포토몽타주(Photo-Montage), 에이젠슈타인(Eizenshtein)의 몽타주(Montage)는 팍투라의 이념 아래 태어난 것으로서 피카소가 콜라주(Collage)에서 보여 준 매체의 수동적, 주변적 활용으로부터 매체 자체가 예술을 구성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이러한 경향은 기계적 기술에서 전기적 기술로의 발전에 영향을 받으며 더욱 확대된다. 나움 가보(Naum Gabo)는 전기력을 이용하여 움직이는 <키네틱 구조물(Kinetic Construction)>(1920)과 같은 작품으로 새롭게 규정된 과학 기술을 우리의 생생한 의식과 감각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Naum Gabo, <Kinetic Construction>, 1919-1920

   이와 같이 새로운 기술들은 예술의 면모를 지속적으로 변화시켜 왔으며 어떠한 측면에서는 가장 순수한 사유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매체를 예술의 형식으로 유입시켜 뉴미디어아트와 같은 장르로서 인식되게 만든 시기는 1950년대 후반, 설치와 퍼포먼스에 TV 모니터나 비디오와 같은 새로운 기술-미디어를 사용하였던 플럭서스(Fluxus) 이후부터였다. 플럭서스 예술가이자 비디오아트의 선구자인 백남준은 1967년부터 소니의 포터블 비디오 기기를 이용하여 본격적으로 뉴 미디어아트의 시대를 열었다. 그는 과거 예술이 간접적으로만 제시할 수 있었던 시간과 공간의 요소를 예술의 주요한 사건으로 제시하였으며, 새로운 기술 매체가 지닌 동시성과 반영성, 상호작용성을 작품의 형식이자 특징적인 내용 자체로서 대중들에게 인식시켰다. 이러한 특징은 현재까지도 미디어아트의 핵심적인 요소로서 간주되고 있다. 또한, 1960년대부터는 앞서 소개한 알고리즘 아트처럼 컴퓨터를 기반으로 예술이 제작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단순히 예술 작품의 제작 환경이 컴퓨터 시스템으로 변화했다는 의미보다는 과거 각기 다른 영역으로 발전해온 예술의 장르들이 하나의 환경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는 측면에서 이후 예술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백남준,<TV 부다> , 1974

   최근 예술은 모든 장르에서 기술-미디어와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으며 이러한 기술과의 결합에 힘입어 예술 장르간의 자유로운 왕래가 시도되고 있다. 에드윈 반 델 하이드(Edwin van der Heide)는 수증기로 가득 찬 공간에 레이저와 사운드를 이용하여 공간에 대한 지각을 허물어뜨리는 작품을 선보였으며, 일본의 미디어 퍼포먼스 그룹인 덤 타입(Dumb Type)은 기존 공연에 적극적으로 새로운 매체를 도입하여 공감각적인 공연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장르간 혼합은 기존의 분리된 예술 장르에서 각기 다르게 강조했던 인간의 감각에 관한 시도들을 보다 혼성적인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마셜 맥루한(Marshall McLuhan)은 인간의 감각들이 분배되는 비율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의 예언처럼 현재의 기술 매체 및 그와 결합된 예술은 서로의 교류에 의해 만들어진 공감각의 전달을 더욱 중시하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과 기술 매체와의 결합이 아방가르드 정신이 왜곡된 채 형식적인 실험으로 물화되는 이유는 기술 매체를 예술의 대립 항으로 위치시키는 일종의 오래된 관습 때문이다. 모더니즘 시기에는 이러한 기술 미디어의 전면화 (당시에는 좀 더 형식주의적 측면에서 두드러졌지만)에 관하여 ‘심미주의(審美主義)’와 ‘기술주의’로 나뉘어 각각 기술의 심미화와 예술의 기술화를 부추겼는데 이러한 관점들은 예술을 바라보는 두 가지의 주요한 시선, 즉 감성과 이성의 측면으로도 확대되어 이해되곤 하였다. 이는 예술과 과학, 기술의 어원들('Ars', 'Scire', 'Techne')이 갖는 근원적인 상관관계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오래된 상호간의 연결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연결성에도 불구하고 예술과 기술을 이분법적 구도로 보려는 시도는 여전히 만연해 있다. 다만, 이러한 시선이 융합과 수렴을 강조하는 현재의 시대에서 그리 유용하지 못한 접근 방식이라는 것은 분명한 듯 보인다. 

Edwin van der Heide, <LSP>, 2006


기술 매체 환경과 예술의 이해와 수용 
 
   그렇다면 이러한 혼성적 뉴미디어 아트가 현재의 시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예술과 과학기술의 만남은 예술의 새로운 형식이나 재료로서만 이해되어야 하는가? 사실, 새로운 매체 예술이 제공한 의미는 매체 사용에 따른 예술에 대한 수용 방식의 변화일 것이다. 특히 복제성(reproductionism), 상호작용성(interactivity), 가상성(virtuality) 등의 요소는 기존 예술이 추구했던 의미를 전복시키고 확장시키며 다른 차원의 의미로 전이시킨다. 과거 예술 작품을 마주하는 관객에게 요구되었던 예술 작품의 수용 방식은 대체로 '감상(appreciation)'과 '관조(contemplation)'였다. 그러나 매체 예술은 근대 예술이 강조했던 '참여(participation)'를 넘어 상호작용을 통한 작품의 체험을 관객에게 요구한다. 원시벽화에서 프레스코와 사실적인 회화, 사진과 영화의 탄생, 텔레비전의 등장, 디지털 매체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매체의 발전에는 일종의 인간의 욕구가 기여했는데, 이는 사각 스크린에 펼쳐지는 가상세계와의 상호작용을 실현시키려는 욕구였던 셈이다. 즉, 대상에 관한 재현을 넘어 재현한 대상과의 상호간의 작용을 꿈꾸어 온 것이다. 발달된 기술 매체는 이러한 인간의 꿈과 욕구를 보다 직접적 형태로 가시화하였다. 과거 인식적 차원에서만 가능하던 상호작용은 기술 매체를 통해 구체적으로 재현될 수 있는 요소가 된 것이다. 레인하드 브라운(Reinhard Braun)은 “모든 미디어는 인간의 상호작용을 형상화한다. 마치 메타포처럼 그것들은 경험을 변형시킨다. 메타포들과 같은 미디어 작업은 지금까지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을 미리 구축해왔다”라고 언급하는데, 이는 예술과 결합한 새로운 기술 매체에 의해 이전까지와는 다른 예술적 경험이 발생할 수 있음을 예견한다. 

   칸딘스키(Kandinsky)는 자신의 저서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당시 전위 예술의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정신의 삼각형’이라는 비유를 사용한다. 살펴보자면 시대의 정신생활이 형성하는 3각형 속의 저변(底邊)에는 광범위한 대중이 있고, 정점에는 고독하고 이해 받지 못하는 예술가가 있다. 그런데 이 3각형은 위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어, 오늘 고독한 정점에 있는 예술가의 예감에 지나지 않던 것이 내일은 지식인의 관심사가 되고 모레는 대중의 취미를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예술의 모습은 이러한 도식과는 달리 예술가의 예감과 대중의 취미와의 간극이 존재하기 어렵다. 예술가의 실험적 시도가 실시간으로 대중들에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인터넷과 SNS를 통해 익명의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모바일(mobile) 기술과 결합된 인터넷과 SNS는 대중들의 삶 속에 밀접하게 그리고 깊숙하게 개입한다. 직접 소통의 한계 때문에 만들어진 매체가 이제는 오히려 익명성이라는 복면과 더불어 진정한 소통을 저해하는 요소로서 인식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인간 유형과 사회의식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매체에 의한 인간 유형의 변화는 과거로부터 관찰되어 왔다. 벤야민은 영화를 수용하는 대중들이 잠재적인 민주 집단이 될 것이라 전망했으며, 안더스(Günther Anders)는 TV에 의해 팬텀 세계가 만들어져 그로부터 '은둔자 대중(Massen-Eremiten)'이 등장할 것이라 예견했다. 인터넷과 SNS는 이러한 방향 모두를 포괄한다. 현재 대중들은 때로는 은둔자로서 때로는 진보적인 세력으로 매체를 이용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새로운 대중, 사회적 유형을 등장시킨다. 미디어는 아우라를 직조한다. 생생한 표현이 가능한 영상을 통해 미디어는 리얼리즘을 재구성하고 가상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예술사에서 사진의 발명 이후, 현실과 괴리되었던 회화의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적 전략이 이제 우리의 삶 속에서 미디어의 표면으로 기능한다.

Antony Gormley, <One & Other>, 2009

   예술은 과거와는 다른 제작 환경과 향유 계층 그리고 새로운 수용의 형태를 필요로 한다. 2009년, 안소니 곰리(Anthony Gormley)는 100일간에 걸친 살아 있는 조각인 를 만들면서 대중을 예술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그는 영국 시내 트라팔가 광장 내 자신이 설치한 조각물 ‘4th Plinth’ 위에서 1시간 보낼 수 있는 사람을 온라인으로 모집하였는데 무려 35,000여명이 신청하였고 100일간 매 시간 참여한 인원이 2,400명에 이르렀다. 참가자들의 작품은 영국의 ‘Sky Arts’ 채널을 통해 중계되고 웹사이트, 트위터, 블로그, 유튜브, 플리커를 통해 기록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현재의 예술이 새로운 전략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술 매체를 적극적으로 자신의 환경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만약, 이전까지의 예술이 순수한 형태의 감상을 필요로 하는 어떤 것이었으며, 그 이후 해독되어야 할 특정한 무엇으로 존재했다면 현재의 예술은 그러한 두 가지의 감상 태도에 더하여 기술 매체를 기반으로 한 공감각적 체험을 전제하는 유희적인 그 무엇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이렇듯 변화하고 있는 예술이 종전 개념 그대로 감상되고 소비되는 현재의 상황이다. 

 

-문학의 이름으로, 4호 (2017년 상반기) 기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