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준의 문화/예술 비평

James Rickett / 아주 가벼운 이미지 하나: James Rickett의 오타쿠적 시선 본문

Arts & Artists

James Rickett / 아주 가벼운 이미지 하나: James Rickett의 오타쿠적 시선

yoo8965 2018. 3. 3. 20:07



   공지영의 에세이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를 보면 아주 사소하고 가벼운 일상이 모여 우리의 삶을 이룬다는 어쩌면 매우 보편적일 수 있는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그러나 때로는 사뭇 진지하고 엄숙한 예술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접근이 가능하다. 금년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의 국외 입주작가인 알렉스 리켓(Alexander James Rickett)의 작업이 그러하다. 그것도 아주 획기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알렉스는 매우 팝 적인 작가이다. 다만, 팝 아트에서 주요하게 사용된 기법이 매우 현재화되어 그의 작품에 활용된다. 그는 디지털 이미지를 오리고 붙혀서 (사실, 디지털 이미지를 오리거나 붙일 수는 없지만, 그의 작업은 crop, copy & paste와 같은 디지털 편집 기법 용어보다는 아날로그적인 자르고 붙이기가 어울린다) 하나의 전체적인 형상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작품의 전체 모습에서 과거의 꼴라쥬 기법을 떠올리게 된다. 달라진 것은 사용하는 재료들인데, 그는 세일러문(Sailor Moon)과 같은 애니메이션 캐릭터에서부터 게임캐릭터, 팝아트에서 주요하게 사용되었던 이미지 아이콘 그리고 3D 가상 세계의 풋티지(footage)까지 매우 혼성적인 이미지들을 수집한다.

머시니마(Machinima)로 만들어진 <Modeling Agency>는 그가 이미지를 채집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을 잘 드러낸다. 그는 게임 속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주로 2000년대 초중반의 일본 콘솔 게임들의)을 모아 일종의 디지털 만다라(mandala, 曼茶羅)를 제작한다. 만다라는 불화의 하나로서 우주 법계의 온갖 덕을 망라한 진수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인데, 그의 작품이 일견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빠르게 흘러가는 천편일률적인 여성 캐릭터들의 모습에서 공통적인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 캐릭터들은 마치 예전 아이들이 오려놓은 종이인형 캐릭터처럼 팔을 벌려 매우 수동적으로 공간 속을 부유한다. 유년 시절의 종이인형 캐릭터에 대한 경험을 떠올려보면 다소 폭력적일 수 있는 여성에 대한 미의 기준이 너무나도 동화스럽게 아이들에게 스며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작품의 의도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발견된다.


디지털 비디오 작품인 <Unagi>에서도 여성성에 대한 관찰이 드러난다. 뱀장어를 뜻하는 ‘우나기’(うなぎ)‘가 작품 제목인 이유는 화면을 가득 채원 에로틱한 애니메(anime) 형상들이 꿈틀거리는 화면이 마치 뱀 혹은 뱀장어의 유기적인 움직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 imamura shohei)에게 두 번째로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동명의 영화 <우나기 うなぎ, 1997>에서 매우 함축적인 의미를 장어의 생태를 유비하여 그려낸 장면들이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한데, 이마무라 쇼헤이가 일흔이 넘은 나이에 해당 작품을 제작했음을 떠올려보면, 작가의 작품은 비교적 젋은 세대가 관찰하는 여성성에 대한 상징적 시선으로 느껴지게 된다.

  알렉스는 <Up All Night>를 통해 스크린 밖으로 뛰쳐나온 디지털 이미지의 조각들을 늘어놓는다. 6m에 달하는 높이의 이 작품은 남성의 옷들을 뒤집어놓은 원뿔 형태로 매달아놓고 주렁주렁 매달린 옷들의 끝자락에 컴퓨터와 모니터를 연결시켜 놓은 설치작품이다. 컴퓨터와 모니터, 키보드 세트는 옷들 사이로 올려지게 되고, 다시금 바닥으로 내려앉기도 한다. 이는 마치 청소가 안되어 어지러운 남성의 옷장을 형상화 한 것처럼 보이는데, 작가는 이러한 남성들의 행태들을 컴퓨터 설치물들과 연동시켜 기묘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앞서의 작품들이 여성성에 관한 작가의 관찰을 담은 작품이라면, 이 작품과 <Little Bachelor>는 남성들에 대한 시선 내지는 그러한 시선의 대한 반영적 모습을 그리고 있다. 완전히 어지러운 남성의 방안 풍경을 그대오 옮겨놓은 듯한 <Little Bachelor>의 설치 전경은 세일러문과 같은 여성성이 강조된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독신남의 삶을 투영시킨다. 흥미로운 점은 설치물 가운데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촉수와 같은 돌기인데, 양말로 감싸여져있는 이 돌기는 방안에 어지러이 배치되어 있는 휴지뭉치와 함께 여성을 관음적으로 훔쳐보는 남근을 상징한다.


이와 같은 작가의 성과 성차(sex and gender)에 관한 시선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닌 현저하게 섹슈얼리티에 입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사회적으로 소외된 오타쿠(オタク)의 눈으로 들여다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작가의 작품을 통해 어떠한 시선을 획득할 수 있을까? 그가 제시하는 오타쿠의 시선이 결국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그 해답은 이미 나와있다. 그가 결국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우리가 경원시했던 그리고 그로부터 탈출하고 싶었던 본능과 금기가 연결되는 지점 어딘가 일 것이기 때문이다.




2016년 8월. 서울난지창작스튜디오 비평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