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준의 문화/예술 비평

박형준 / 해체적 감정 공간의 탄생 : 공감과 반감 그리고 텔레파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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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 해체적 감정 공간의 탄생 : 공감과 반감 그리고 텔레파시

yoo8965 2015. 3. 24. 16:29




   화면 속에서 우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매우 긴 호흡으로 슬픔은 느림으로 재생된다. 고속촬영에 의한 슬로우 비디오, 박형준의 최근작 <플라시보>는 이러한 기술적 재생 장치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하는 작가의 감정을 조절한다. 감정은 항상 그것에 관한 공감과 그에 반하는 역설적 감정을 동시에 수반한다. 주체의 슬픔은 타자에겐 공감의 감정으로 수렴될 수 있지만, 그 슬픔 속에 자신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일종의 안도감을 동시에 경험케 한다. 따라서 ‘플라시보(placebo, 위약)’라는 작품의 제목은 다분히 역설적이다. 관객은 이 비디오를 통해 일순간 작가가 제시한 슬픔이라는 기표에 도달하게 되지만, 끝내 화면 속 슬픔의 의미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이러한 역설은 작품의 제목에서도 발견되된다. ‘위약(僞藥)’은 말 그대로 정신적 효과를 얻기 위해 약리 효과가 없는 조약(調藥)을 의미한다. 즉, 일종의 가상적 장치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약이 실재적 효과를 발생시킬 때, 위약은 더 이상 위약이 아닌 그리고 가상을 벗어난 실재가 되어 스스로에 대한 존재론적 모순을 드러낸다. 마치 작품이 전달하려 하는 슬픔의 공감, 그리고 해소라는 해결책이 온전히 슬픔으로 관객에게 공감될 때가 아닌, 슬픔 속에 감추어진 반감(반대 감정)을 통해 획득되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박형준 작업의 의미를 공감과 반감의 과정으로 풀이해보자면, 그것은 일련의 공감-반감 그리고 기술이 개입된 원격정신반응, 즉 텔레파시의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자아에서 타자로, 타자에서 다시 자아로 되돌아가는 환원적 사유가 중첩된다. 박형준은 자기 자신에 관한 관찰로부터 자아, 즉 주체로서의 자기 인식의 과정을 탐구하려 한다. 2011년작 <나는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에서 그는 3D 프린터와 거울, 센터와 모터라는 기술적 매개체를 통해 자신에 관한 반영을 시도한다. 자신에 관한 관찰은 타자에 의해서 혹은 거울과 같은 매체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인식하는 데에 자기 자신 이외에 다른 그 무엇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결국 스스로를 규정하는 (타자와의) 차이에 관한 인식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타자에 대한 욕망이 그리고 그로부터 인식되는 자기규정이 작품의 주요한 의미 체계를 구성한다. 작품은 3D 프린터로 만든 조형물을 거울 위에 설치하여 착시를 통한 환영을 경험케 하는 방식으로 작동된다. 관객은 가시적이지만 실재하지는 않는 조형물을 통해 가상과 현실의 간극을 체험하게 되며, 작품의 제목이 암시하는 선택적일 수 없는 자아라는 추상적 존재에 접근하게 된다.

   이러한 기술적 장치에 의한 자아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파생된 감정에 관한 관찰은 2012년작 <Inside Outside>에서도 발견된다. 이 작품은 보다 직접적으로 작가와 관객의 신체적 연결을 시도한다. 외부(바깥)에 위치한 관객의 심장 박동수에 의해 내부(안)에 있는 작가의 신체가 반응한다는 작품의 내용은 이중적 속박 구조를 지닌다. 하나의 작용은 심장 박동이라는 생체 현상이 타자의 신체 움직임을 부여하는 요소가 된다는 매우 명확한 기술적 작용이다. 관객들은 손가락 센서를 통해 스스로의 심장 박동을 유리라는 매개물 안에 위치한 작가(행위자)에게 전달한다. 작가는 팔에 붙어있는 전기적 물리 치료기의 전극을 통해 관객의 박동을 전달받는다. 그런데, 흥미로운 부분은 이러한 작용이 신체적인 차원에서만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 작용과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행위자의 신체를 관찰하게 된다. 안과 밖을 구분하는 유리라는 매개체는 서로의 신체와 표정을 투명하게 매개한다. 따라서 관객은 행위자의 신체를, 행위자는 관객의 신체를 마주한다. 이러한 상황은 관객의 심장 박동이라는 최초의 신호 발생의 순간조차 신체적-감정적 연대의 구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드러낸다. 행위자의 신체는 관람객의 감정에 그리고 행위자의 감정은 관람객의 신체로 동시에 침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공감과 반감, 안과 밖이라는 대립 지점과 거리가 소멸하는 원격정신반응이 함께 발생한다.

   한편 <떠다니는 신체>, <투과될 수 있는 심장>, <비어있는 자소상>의 작품 군을 종합하는 <나는 인공물이다>의 경우, 앞서 언급했던 <나는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에서 드러났던 자아에 대한 일련의 감정(불신과 반감)을 보다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방식으로 검증하는 작품들이다. 작가는 의학 연구소에 의뢰하여 자신의 몸을 MRI(Magnetic Resonance Imaging, 자기공명영상)를 통해 스캔한다. MRI는 자기장을 발생하는 커다란 자석 통 속에서 고주파를 발생시켜 신체부위에 있는 수소원자핵을 공명시켜 각 조직에서 나오는 신호의 차이를 측정하여 컴퓨터를 통해 재구성하여 영상화하는 기술이다. 박형준은 영혼이라는 비과학적 요소의 실재 존재 유무를 파악하기 위해 과학적 방식을 도입한다. ‘우리에게 영혼이 존재하는가?’, ‘영혼이 존재한다면 어떠한 형태일까?’ 그리고 ‘그곳이 존재하는 장소는 어디인가?’ 등의 실질적 의문은 작품을 크게 세 가지의 작품 군으로 구성하게 만든다. <떠다니는 신체>는 MRI 스캔시의 비디오 촬영 영상과 그것을 스캔한 1000장의 이미지로 구성된 작품인데, 신체 내부에서 영혼을 탐색하는 과정을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이 작품은 두 가지 차원의 감정적 인식을 유도한다. 첫 번째는 스스로의 몸이 제약된 상황에 관한 주체적 인식이며, 두 번째는 그러한 제약에 묶인 신체를 타자화 된 시선으로 관조하는 객관적 차원의 것이다. 전자는 신체 내부의 영상/이미지를 스스로의 몸에 투영시켜 보편적 신체의 이미지를 경험케 만들며, 후자는 마치 새로운 세계를 유영하는 듯한 유사-항해 경험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인식 과정은 인간의 신체라는 공간 속 특정 장소들에서 다시 충돌한다. <투과될 수 있는 심장>은 이러한 충돌의 지점이 발생하는 첫 번째 장소이다. MRI 데이터를 바탕으로 실제 크기로 제작된 가상의 밀납-심장은 영혼이 머무르는 유력한 추정 장소로 간주되었던 심장이라는 공간을 물리적 오브제로 해체한다. 신체 ‘속’에서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작동 기재인 심장은 신체 ‘밖’에서 객관화되어 결국 신체의 일부로 귀속될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성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비어있는 자소상>의 경우, 또 다른 장소인 ‘뇌’라는 신체 기관을 비어있는 공간적 요소로 차용한다. 225개의 투명 아크릴 판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우리의 얼굴과 머리의 외형적 요소를 입체적 부조 기법으로 제시한다. 2mm 두께의 판이 결합되어 정육면체의 입체 큐브를 구성하는데 안 쪽이 비어있는 형태이다. 흥미로운 점은 작품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머리의 형태가 환조가 아닌 속이 비어있는 부조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인데, 작가의 메시지가 드러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위의 심장과는 다르게 <비어있는 자소상>이 제시하는 인간의 머리-두뇌는 오히려 공간 속에 갇혀있는 동시에 비워져 있다. 때문에 ‘비어있다’라는 자소상에 덧붙여진 수식은 작품의 출발점이 되었던 영혼의 실재적 부재를 의미하는 동시에, 현대 과학 및 의학이 규명하고자 하는 인간 신체에 관한 혹은 영혼에 관한 접근이 결국 우리의 환상에 갇혀있음을 자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자아 탐구의 과정은 결국, 타자에 대한 관계로의 이해 과정, 그리고 그러한 주체와 타자를 관통하는 보편성에 대한 의식으로 전이된다. 그리고 작가는 자아에 대한 감정적 의식의 공감과정과 공감의 반대편에 위치하는 감정이 투영되는 방식 그리고 기술적 매개를 통한 원격정신반응 즉 텔레파시적 과정으로 이러한 경로를 추적한다. 따라서 다시 최근 작업인 <플라시보>로 돌아가보면,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은 작품이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내용적 측면이 아닌 작품을 구성하는 환경 그리고 그러한 환경에 개입하는 타자들, 즉 관객들에 의해서임을 알 수 있다. 박형준은 이러한 지점을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그는 이전에 기계적 매체를 통해 그러한 공감과 반감의 과정을 원격적으로 수행했다. 그러나 <플라시보>는 관객들을 초대하여 함께 슬픔의 과정을 직접적으로 공유하는 ‘크라잉 워크숍 Crying Workshop'을 통해 본래 의도했던 목적을 달성한다. 들뢰즈는 의식의 표상 활동은 차이를 동일성에 종속시키고 개념적 차이로 만드는 활동이라 설명한다. 그의 언급처럼 슬픔을 공유하는 워크숍을 통해 감정은 동일한 장에서 마주하게 되며, 그 속에서 미묘한 차이로 표상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이의 대상으로, 투영과 반영의 객체로 등장했던 감정이 드디어 분리 불가능한 현전의 장으로 침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현장에서 작가와 공명한다. 공감과 반감, 텔레파시로 구성되는 해체적 감정의 공간은 이로부터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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