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준의 문화/예술 비평

박준범 / 프레임의 안과 밖, 대운하라는 가상과 현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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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범 / 프레임의 안과 밖, 대운하라는 가상과 현실

yoo8965 2013. 11. 23. 15:37


  미디어 이론가 권터 안더스(Gunther Anders)는 전통적인 현실과 가상의 이분법이 TV와 같은 새로운 매체에 의해 해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TV 화면이 제공하는 이미지는 분명 현실을 지시할지 모르지만 TV가 놓여 있는 거실 속의 현실은 아니며, 새로운 매체들이 제시하는 세계들은 일종의 허구이지만 현실이며 동시에 가상인 까닭이다. 박준범은 비디오라는 매체를 이용하여 현실과 가상의 이분법적 세계와 그 사이에 존재하는 역설적 상황을 드러내왔다. 안더스의 표현을 빌자면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닌 제 3의 존재층인 '팬텀(Phantom)'으로서의 세계를 표출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전작들로부터의 흐름을 살펴보면 이와 같은 시도들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사물이 가지고 있는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거나, 독립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프레임 안 쪽의 세계로 프레임 밖의 주체가 개입하는 상황 등이 그것이다. 그는 비디오가 가진 형식적 문법을 통해 현실 세계를 재발견하게 만드는 반영과 성찰의 기능을 자신의 작품에 부여했다. 


   지난 8월 22일부터 진행된 박준범 작가의 개인전 <호주 대운하 계획>은 2011년부터 국내의 젊은 작가를 후원하고자 기획된 신도리코 작가지원 프로그램(SINAP: SINDOH Artist Support Program)의 일환이자 작가가 참여했던 호주 멜버른의 '거트루트 컨템포러리(Gertrude Contemporary)'와 시드니 '아트 스페이스 레지던스'에 대한 귀국 보고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박준범은 최근 다양한 지역적-공간적 특성을 고려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데, 이번 프로젝트 역시 그러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그는 호주의 중부 사막을 남북으로 가르는 대운하를 가상적으로 축조하였다. 그리고 그 장소와 공간이 가지고 있는 맥락과 자신이 작업해 온 코드를 적절히 융합시켰다. '운하(canal , 運河)'라는 건설-토목 사업의 근간에는 해당 국가가 지닌 정치-사회적인 맥락이 담길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도 운하는 군사적 혹은 물자 수송을 위한 기능적 목적과 더불어 관광이라는 심미적 목적을 동시에 가지는 인위적인 환경 조형물로 여겨져 왔다. 호주는 국내에 비해 훨씬 더 광대한 토지와 자원을 가지고 있는 국가이다. 따라서 작품 속 대운하는 국내의 실정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 공간에서 유사한 문제를 제기한다. 


   흥미로운 부분은 작가의 이러한 가상적 시도가 스스로의 전작들로부터 힘을 얻어 자생적이면서도 유기체적인 구조를 획득한다는 점에 있다. 박준범은 과거로부터 시간의 경과에 따른 환경의 변화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요소들과 더불어 건축물이 지닌 구조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교통과 건축, 도시와 토목 등의 요소를 작품에서 적절히 선보여 왔다 (<Structuralism, 2008>, <The Collapse, 2010>, <How to Resist Humidity, 2011> 등). 이번 전시에서도 이와 연동되는 흐름을 발견할 수 있는데, 전시 제목이기도 <호주 대운하 계획>을 비롯하여 <종이트럭>, <포크레인>, <Mock up Dam> 등과 같은 작업은 그가 가상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자신의 전작들로부터 기본적인 구조를 차용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게 만든다. 즉, 그의 전작들이 가상 세계의 일부분으로서 통합되어 읽힐 수 있는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는 셈이다. 때문에 박준범의 작업은 과거 그가 시도했던 순간의 관찰과 해학을 넘어선 통합적 세계에 관한 종합적인 조망이 된다. 박준범은 <호주 대운하 계획>이 종료된 작품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이번의 시도가 개념적이고 가상적인 조망도 차원의 것이었다면, 현실적 통계 자료와 더불어 그가 만든 가상적 구조에 살을 붙이는 작업이 예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계획은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가상적 세계가 이후 더욱 확장되고 깊어질 것을, 그리고 가상적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실 세계로의 방향성을 지니게 될 것을 기대하게 만든다. 마치 프레임 안쪽에서만 존재했던 그의 가상 세계가 프레임 밖 현실 공간으로 침투하고 있는 듯이 말이다. 



-퍼블릭아트 2013년 9월 기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