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준의 문화/예술 비평

이종석 / 이입과 일체, 코드화된 신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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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석 / 이입과 일체, 코드화된 신체

yoo8965 2011. 8. 21. 02:42


  포이에르바하 Ludwig Feuerbach 19세기 중반, 당시 사회의 모습에 관하여사물보다 형상을, 원본보다 복제를, 현실보다 표상을, 본질보다 가상을 선호한다고 언급하며 무한한 권위를 지닌 이미지의 시대를 예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예고는 세기를 넘어 디지털 이미지로 점철된 현재의 시대에 이르러 더욱 유효해 보인다. 왜냐하면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근본적 체질 자체가 가상적으로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징후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환경적 요인에서 관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즐겨 시청하는 TV프로그램을 살펴보자. 그들은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이상적이면서도 모순적인 역설적 상황을 설정하는데, 이러한 다소간의 억지 설정을 시청자들은 쉽게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러한 역설의 극대화를 꿈꾸고 있다.

 

<물결 Wave>, 16mm 촬영 DV편집, 12’ 40”, 2002

 

  작가 이종석은 주체를 바라보는 시각의 이중성으로부터 변화하는 사회의 모습을 조명한다. 동양화를 전공했던 전력 때문인지, 그는 자연적인 오브제를 초기작에서부터 현재의 작업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등장시키고 있는데, 그 등장의 면면이 이채롭다.

 

천만리(千萬里)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희옵고

내 마음 둘 듸 없어 냇가의 안자이다.

져 물도 내 안 같도다 우러 밤길 녜놋다

 

이 시조는 조선 시대의 문신 겸 시인이었던 왕방연(王邦衍)시조 한 구절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임과의 이별 후, 흘러가는 시냇물을 보며 임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이종석 2002년작 <물결 Wave>에서도 이러한 감성이 드러난다. 그는 영상 매체의 형식적 실험을 진행하는 동시에 평면 작업에서는 풀어낼 없던 시간의 경과에 따른 주변 환경의 변화를 세밀하게 포착한다. 16mm 비디오를 사용하여 제작된 실험영화 형식의 작품에서는 흐르는 강물과 그에 조응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작품의 초반에서부터 흐르는 강물은 자주 등장하며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대변하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시도는 과거 동양적 화법에서의 작가 혹은 주인공의 감정이입의 상태를 보여준다.

 

  그의 이러한 감정이입의 시도는 현재작까지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2003년부터 최근까지 진행된 <나무 Tree> 시리즈를 보면 나무의 외형과 인간의 몸을 대치시키고 있는데, 나무의 부분들 (뿌리, 가지)과 인간 몸의 부분을 동시에 회전시켜 그들이 지닌 공통 지점을 추적케 한다. 특히, 2007~8년에 선보인 <Tree-Man, Echo, Others> 등과 같은 작품에서 그는 이러한 대비 구조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각각 인간의 몸과 나무를 표현한 ‘Man’‘Others’와 몸과 나무를 함께 회전시킨 ‘Echo’의 경우, 세밀하게 작업된 촬영을 기반으로 한 그래픽 이미지 기술로 대상체가 표현되고 있다. 다만, 초기의 작업에서 자연 대상물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어(촬영하여) 스토리 안에서 이입을 시도했다면, 최근에는 기술적 이미지로서 직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작가가 시도했던 매체의 형식 실험이 정제되어 하나의 방향성을 띄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입의 새로운 국면, 즉 앞서 언급했던 가상화된 대상들에 존재하는 이중적 시선이 표현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예전 작품에서 자연적 대상물에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유비적으로 이입했다면, 최근 작업에서는 인공적인 대상에 몇 가지 시점들을 동시적으로 나타낸다는 점이다.

 

<Tree-echo>, Double Channel HD Video, 2’ 10”, 2007

 

  2010년작 <Urbanwave-resonance>을 그러한 지점에서 분석해보자. 앞서 소개한 2002년작 <Wave>에서 나타난 강물의 물결치는 모습들은 금속화된 표면재질(빌딩의 유리 표면)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예전 작업에서 강물은 전체 스토리 속에서 주인공의 심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매개물이었다면, 근작에서의 빌딩 표면의 물결은 전혀 다른 심상을 관람객들에게 제공한다. 우선, 금속적 표면은 첫 면에서부터 차가운 도시적 대상으로 나타난다. 다만, 금속 표면에 반영된 이미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의 이미지이다. 다소 이질적이지만 과거의 작품과 연결되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다. 반영된 이미지는 물결에 의해 도시의 풍경에서 녹음이 우거진 숲의 모습으로, 또 다시 도시의 이미지로 변화하는데,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과거, 주인공의 심상을 투영했던 초기의 이종석의 작품과의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다.

 

<Urbanwave-resonance>, Double Channel HD Video, 3’ 5”, 2010

 

  그러나 왜 작가는 이러한 감정이입을 통해, 물아일체적 상황을 작품 속에서 구현하려 하는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종석은 주변 오브제에 감정이입을 시도하며 또한 대조적 자연물을 등장시키는 한편 종국에는 물아일체적 혼재를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시도가 현재의 테크놀로지를 통해 보다 확장된다는 점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왜냐하면, 주체를 투영시키는 예술의 작동 방식에서 기술-미디어가 가져다 준 새로운 영역은 생각보다 광활하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종석의 작품에서는 최근의 작업에 와서 더더욱 이미지 속 대상의 정체가 분명해진다. 이러한 점은 테크놀로지를 사용하여 예술 작업을 진행하는 작가들의 단순하지만, 분명한 기준이 되었던 하나의 원칙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것은 강한 알레고리를 담고 있는 대상을 이미지에 출현시켜 시각적 비매개와 메시지를 동시에 전달하는 방식인데, 이종석의 경우 대상과 주체를 화면에 명료하게 등장시켜 작가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와 주체적 시선을 강하게 전달하는 동시에, 스크린에 나타나는 이미지의 표면 재질을 매끄럽고 아날로그 적으로 재련하여 감상자들에게 다중적인 의미를 전달한다. <Urbanwave-resonance>의 경우, 크게 세 가지의 (의미) 층위를 보여주는데, 차가운 금속 재질의 표면과 그 위로 잔잔히 흐르는 물결과 같은 일렁임, 그리고 그 속에 나타나는 우리의 주변 풍경의 모습이 그것이다. 감상자들은 이러한 다중적 의미층을 통해 차가운 따스함과 같은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지의 감각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Lighthouse-tangled>, Double Channel HD Video_turning installation, 1’ 30”, 2010

 

  <Lighthouse-tangled>는 이러한 이종석의 작업을 또 다른 차원에서 이해하게 만든다. 회전하는 프로젝터는 공간 전체에 얽혀있는 대상을 드러내는데, 이전까지 이종석의 작업이 평면적 화면 속에서 주제를 다루었다면,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문제 의식을 공간 속으로 투영시키고 있다. 물론, 소재와 주제는 이전의 작품들과의 연결점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몸으로 대변되는 주체, 그리고 나무의 부분으로 유비되는 얽혀있는 선들이 복잡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종석은 매체가 지닌 이중적 의미를 적극 활용한다. 그에게 있어 미디어는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코드화된 인간과 자연을 표현하는 포장지이자 일종의 은폐막이다. 다양한 코드로 상징화 된 인간의 몸과 자연적 오브제들이 그의 작품에서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다중적 의미로 나타난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주체는 그 경계를 강화하거나 고정된 정체성으로 일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체와 객체를 전이시키는 동시에, 이를 둘러싸고 있는 관계들을 재정립한다. 그렇다면, 이종석이 이후 추구할 방향은 어떠할까? 테크놀로지를 더욱 활용하여 현실에 입각하지 않은 오브제를 대상화할 것인가? 아니면 매체가 가진 특성을 보다 디테일한 이입의 수준을 위해 활용할 것인가? 그의 작품에서 제시된 코드화된 인체와 대상체의 이후 관계가 더욱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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