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준의 문화/예술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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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예술, 감각과 반영 사이에서의 새로운 가능성

yoo8965 2011. 8. 21. 02:19

미디어아트, 현재의 상황

  1960년대 초, 백남준은 비디오‘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기존 예술이 가지고 있던 통념들을 비틀고 전복시켜 버렸다. 이러한 그의 작업이 전 세계적으로 예술계 및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까닭은 비디오’라는 매체 자체가 지닌 특이성 때문이 아닌 그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양상, 그리고 예술적 흐름 등이 매체가 지닌 속성들 속에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기술에 의해 탄생된 매체들은 예술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특히나 기존에 분리되어 발달해 온 다양한 예술 장르들이 하나의 형태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라는 큰 기대감 또한 불러일으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미디어아트의 상황을 점검해 보자. 디지털 환경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작품들이 여기저기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지만, 관객들은 그것이 어떠한 예술적 감성을 우리에게 공급하고 있는지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더더욱, 음악과 시각 예술, 그리고 행위 예술 등의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한 실험적 예술들 또한 여기저기서 발생하고 있지만, 아직 우리는 그것이 새로운 예술의 모습이라고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현재의 미디어아트에 있어 심각한 고민거리 중 하나는 관객들과의 소통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한 때, 미디어아트의 강점이자 특이점으로 부각되기도 했던 상호작용적 요소들은 오히려 미디어아트를 구속하고 위협하는 불안 요소로서도 나타나기도 한다. 가령, 예를 들어보자면, 전시장에 설치되어 있는 미디어아트 작품들은 관객들이 어떠한 작용을 가하기 전에는 그저그런 스크린 세이버 정도로 보여지기 십상이다. 관람객들과의 소통의 가능성을 무기로 한 미디어아트에 있어 이러한 사항은 매우 안타까운 부분이다. 또한 더더욱 고민해보아야 하는 지점은 그러한 상호작용‘들이 제대로 작동한다 하더라도, 관객들이 느낀 상호간의 작용이란 것이 그저 기술적인 놀라움에만 머무른다면, 미디어아트가 지닌 진정성은 퇴색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현재의 미디어아트는 위에서 열거한 여러 가지의 어려움들을 극복해야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조심스럽지만, 이러한 미디어아트의 정체기를 두고 몇 가지의 향후 전개 방향을 예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한 가지는 현재의 미디어아트가 지닌 예술성의 심화이다. 물론, 이러한 명제는 예술의 범위까지 논의의 범주에 포함시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다소 민감하고 확장적인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다만, 현재의 예술의 범위에서 미디어아트가 빈번하게 예술 이외의 그 무엇으로 치부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주장은 실질적인 설득력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본 글에서는 다른 방향성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미디어아트의 향후 전개방향에서 중요하게 부각될 수 있는 또 다른 지점은 새로운 기술 환경과의 접점, 즉 인터페이스의 확장을 통한 미디어아트 자체의 개념 확장과 소통의 극대화이다. 만약, 전자가 예술 장르로서의 심화를 의미한다면, 후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장르의 해체 및 개념의 확장을 의미한다. 이러한 두 가지의 방향 전개는 미디어아트를 구성하는 ‘미디어’와 ‘아트’라는 요소들 사이의 갈등과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모색될 수 있는 점에서는 다분히 본질적인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과거 미디어가 새로운 수단으로서 예술의 재료에 포함되는 수준이었다면, 현재의 미디어는 보다 광의적인 의미로 예술에, 또한 우리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논의의 수준을 보다 광범위한 사회 전반의 문제와 연결지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현실의 가상화, 심미화 : 재생산된 실재의 기술적 조작

  현재 우리의 실제 세계는 매체에 의해 강력히 매개되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탈실재화의 과정을 겪고 있다. 우리의 현재의 삶의 모습을 살펴보면, 이러한 주장이 꽤 설득력있는 주장이라는 데에 큰 이견을 제시하기 어려울 것이다. 가령, 우리는 핸드폰 알람으로 잠자리에서 일어나 인터넷 페이지를 열어 세상의 소식을 듣고, 핸드폰을 통해서 타인들과의 소통을 시도한다. 컴퓨터가 존재하지 않는 일터를 생각하기 힘들게 되었고, TV 없는 여가시간을 떠올리기 힘들다. 우리들의 삶의 방식들이 자연스레 가상화 된 현실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매체가 지정한 시각으로 신체의 리듬을 조정하고, 세상의 갖가지 이야기들을 사각 스크린을 통해 접하고 있는 우리는 전자파의 파동으로 친구의 음성을 기억하고, 가상의 이미지들로 삶의 위안을 얻게 된다. 어느새 철저하게 가상화 된 현실은 이렇듯 기술 집약적 매체들로 매개된 실재로서 우리 곁에 존재한다. 볼프강 벨쉬(Wolfgang Welsch)의 말을 빌자면, 현실은 매개적으로 자기의 근원에까지 가상적이고 조작 가능하며 심미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 하나의 산물이 되었다.1) 이러한 언급처럼, 가상화된 현실이 우리에게 조작 가능한 심미적 구성물로서 다가오고 있는 것이라면, 미디어아트는 자연스레 현실에 덧입혀져 보다 넓은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는 그 무엇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디어아트가 확장되어야 하는 영역과 극대화 된 소통의 모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여기서 다시 벨쉬의 언급을 떠올려보자. 벨쉬는 앞서 언급한 현실의 탈실재화 및 가상화, 심미화를 주장하며, 현실에 대한 재생과 시뮬레이션 사이에 있는 차이가 점점 더 모호해지며, 매체 자체는 이에 상응하여 자신의 이미지들을 점점 가상성 및 놀이와 같은 방법으로 제시한다고 말한다. 부연하자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매체들은 그들의 모습 자체를 우리가 지닌 현실 이미지에 덧씌우고, 보다 가상화된 플랫폼으로서 우리를 그 속에 위치하게 만들고 있다. 과거, 매체는 말 그대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기능으로 하는 그 무엇이었다. 따라서 우리들은 매체들을 도구적으로 이용해왔고, 삶의 풍요로운 확장을 위해 사용하였다. 그러나 기술이 부여해 준 매체의 특권은 여기까지가 아니었다. 신기술에 의해 발생한 새로운 매체들은 프로그래머의 입력에 따라 현실을 조작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컨텐츠를 제한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흐름은 매체들에 의해 구성되는 현실의 모습들을 보다 심미적으로 변화시키게 된다. 보다 가상화된 매체에 의한 현실의 이미지들은 필연적으로 실재의 구속력을 버리고 가상이 제공하는 유희적 특성 속으로 함몰된다. 따라서 전자 공간의 ‘존재의 가벼움’은 현실의 심미화의 또 다른 특징이자 경계해야할 그 무엇이 된다.


반성-취미로서의 게임 예술

  앞에서 언급한 현실의 가상화 및 심미화는 감성적인 지각으로부터 발생한다. 여기서 말하는 감성적 지각이란, 매체에 의해 탈실재화 된 현실 세계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감각적인 ‘쾌’를 추구하는 현상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은 컴퓨터와 비디오 게임에서 제공하는 가상적 환경에서의 대리만족 현상과 유사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현실을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형상화 작용에서부터 유희성을 발견하기 때문이며, 2) 그렇게 만들어진(형상화된) 이미지 세계 속에서 물리적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감각 만족을 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감성적 지각이 지닌 이중적 특징이 드러난다. 바로 감각과 지각이다. 심미적이라는 것은 감각에서 쾌를 강조한다는 관점에서 ‘쾌락적인’ 의미를, 지각에 대한 고찰 태도라는 관점에서 ‘이론적인’ 의미를 취하는데, 이러한 부분은 취미-만족에 있어 단순한 “감각-취미 Sinnen-Geschmacks”로서와 “반성-취미 Reflexions-Geschmacks”로서의 구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전자가 보다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인간의 욕구라면, 후자는 그것에 대한 반성적인 태도이다. 3) 일종의 거리두기라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이 반성-취미로서의 심미화에 대한 욕구인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흐름은 컴퓨터 및 비디오 게임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쾌와 미디어아트를 통해 전달되는 일종의 매체와의 거리두기에서 발견된다. 호이징하가 놀이와 예술의 관계에서 ‘시’ 와 ‘음악’을 예로 들며 둘 사이의 밀접한 연결성을 설명한 것을 떠올려보면, 이후 게임과 예술이 지닌 상호연관성을 관찰해 볼 수 있다. 다만, 호이징하가 주목한 부분이 논리와 인과 과정, 관념과 판단의 영역이 들어서기 전 인간에게 유희적이고 자유로운 혹은 자연스러운 영역으로서의 놀이의 영역을 산정하고 예술이 지닌 감성적이고 유희적인 영역으로부터 그 연결성을 시사하고 있는 점과 놀이의 동기가 구체적인 목표를 따로 설정하지 않고 순수한 ‘기쁨’이라는 덕목을 추구하는 점에 있어서의 창작적이고 예술적인 지점을 언급하는 점에서 보면, 4) 그는 순수한 놀이와 예술의 유사성 내지는 연결성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의 역할이 당시의 상황과는 다른 역할까지 확장된 최근의 상황에서는 보다 실질적 관계 속에서 양자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예술에 있어 일종의 거리두기의 기능이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부각되는 점을 떠올려볼 때, 앞서 제기한 감각과 반성으로서의 양자의 역할을 기대해 볼 수도 있을 일이다. 생각해 볼 지점은 이러한 감각-취미와 반성-취미와의 격차가 갈수록 좁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술과 게임에서도 좁혀지고 있는 거리를 체감할 수 있는 작업들이 등장하고 있다. 린든 랩의 새컨드라이프(Second Life)는 기존 게임이 지닌 개념을 넘어 일종의 가상 플랫폼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고, 미디어아트 작품들은 보다 상호작용적이고도 가상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데에 여념이 없다. 관객들은 더 이상 수동적인 감상자가 아닌 창조적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예술 작품을 스스로 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발전적인 공약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게임과 예술이 보다 밀접하게 서로의 영역에서 조우하기는 쉽지 않다. 게임은 예술의 순수성을 비난하고, 예술은 게임의 상업성을 비난한다. 그러나 갈수록 더해가는 현실의 가상화 및 심미화의 경향은 새로운 반성-취미로서의 게임과 예술을 필요로 하게 된다.

_앨리스온, 2009년 커버스토리


1) Wolfgang Welsch, "Artificial Paradises? : Considering the World of Electronic Media - and Other Worlds", Grenzgynge der? Sthetik, 1995, 심혜련 역, 「인공낙원? - 전자 매체 세계와 다른 세계들에 관한 고찰」,『미학의 경계를 넘어』, 향연, 2005, pp. 313~314 참조.

2) 우리가 놀이를 어떠한 이미지 조작, 즉 현실을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형상화 작용(Verbildichung)에 근거하는 것으로 본다면, 우리의 주된 관심은 이러한 이미지들의 가치와 의의, 그리고 현실을 그 이미지로 형상화시키는 작용 즉 "상상력"의 가치와 의의를 파악하는 데 기울여져야 할 것이다. 요한 호이징하는 “호모 루덴스, 놀이와 문화에 관한 한 연구  A Study of the Play Element in Culture” 의 머리말에서 우리 종족(species)를 설명하기 위한 용어로서 책의 제목이기도 한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라는 용어에 관해 설명한다. 그는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을 ‘만드는 인간(Home Faber)'과 이웃하는, 그러나 '생각하는 인간(Homo Sapiens)'과는 같은 차원에 속하는 술어로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을 참조하기 바람 : Johan Huizinga, Homo Ludens, A Study of the Play Element in Culture, 1955, 김윤수 역, ≪호모 루덴스, 놀이와 문화에 관한 한 연구≫, 도서출판 까치, 1993, pp. 7~8 참조.,

3) Wolfgang Welsch, "Artificial Paradises? : Considering the World of Electronic Media - and Other Worlds", Grenzgynge der? Sthetik, 1995, 심혜련 역, 「인공낙원? - 전자 매체 세계와 다른 세계들에 관한 고찰」,『미학의 경계를 넘어』, 향연, 2005, pp. 313~314 참조.

4) Johan Huizinga, 같은 책, p. 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