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준의 문화/예술 비평

기억(Memory)와 색인(Index) 사이에서 : 인터넷 아트의 미학적 가능성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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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Memory)와 색인(Index) 사이에서 : 인터넷 아트의 미학적 가능성

yoo8965 2020. 8. 4. 02:52

서울시립 북서울 미술관 <Web-Retro>展, 온라인 아카이브

 

들어가며. 메멕스(Memex)와 기억 확장의 꿈

 


   2차 세계 대전에서 원자 폭탄을 개발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관리하고 추진하였던 주역 중 한사람이었던 바네바 부시(Vannevar Bush)는 1945년 발표한 선구적인 논문 「우리가 생각한 대로 As we may think」를 통해 기억의 확장 장치인 ‘메멕스(Memex)’라는 하이퍼텍스트 컴퓨터 시스템을 제안하였다. 이 장치는 일종의 가상적 기계 장치인데, 개인용으로 사용되는 정보 처리 기계 및 인간과 컴퓨터 간의 인터페이스에 대한 최초의 묘사로 여겨지고 있다.(1) 그는 링크들에 의해 연결된 텍스트의 블록들(blocks of text)이라는 개념을 제안하며 그 자신의 새로운 테스트 개념을 설명하기 위하여 ‘링크(links)’, ‘연계(linkages)’, ‘자취(trails)’ 그리고 ‘웹(web)’이란 용어를 소개한다. 이는 이 용어들을 통해 읽기와 쓰기라는 인쇄 문화로부터 파생된 두 가지 행위가 급진적으로 재형성 되어야 함을 요구하고 있는데 결국 각각 독자들의 요구에 개방적인 텍스트의 개념을 소급하였다. 부시의 이러한 주장이 흥미로운 이유는 구텐베르크 이후로 서구 사상을 지배하고 있던 정보기술의 근본적인 가정들 가운데 몇몇을 거부하면서 시작했다는 점이다.(2) 즉, 저자의 개념이 공고하게 그 사회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을 때, 독자를 더 이상 텍스트 및 작품의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로 만드는 문학작품의 목표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Roland Barthes)는 이러한 맥락에서 문학이 텍스트의 생산자와 사용자, 텍스트의 소유자와 소비자 그리고 텍스트의 작가와 독자 사이의 무자비한 분리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설명하며 ‘읽기 텍스트(readerly text)’와 ‘쓰기텍스트(writerly text)’를 구분한다.(3) 그는 다양한 경로들과 연쇄들 혹은 흔적들에 의해 결합된 단어들(혹은 이미지)의 일군의 블록들로 구성된 텍스트를 언급하며 컴퓨터 하이퍼텍스트(Hypertext)라 불리게 될 것에 전적으로 어울리는 이상적인 텍스트성을 기술하였다. 인터넷 테크놀로지가 일반화된 현재, 디지털 매체가 제공하는 상호작용성은 일반적인 매체가 가진 특성으로 수렴되었다. 특히 네트워크에 기초하여 비선형을 넘어 다선형적이고 다연속적(multisequential)으로 경험되는 텍스트를 창조하는데,(4) 이는 데이비드 볼터(J. David Bolter)의 지적처럼 (하이퍼) 텍스트가 더 이상 수동적으로 해독되는 닫힌 개념이 아닌, 후기 구조주의적인 열린 텍스트 개념들을 구체화하고 있음을 드러낸다.(5) 그렇다면, 다시 메멕스로 돌아가보자. 부시가 꿈꾸었던 확장된 기억 장치로서의 시스템은 현재의 시점에서 구동되고 있는가? 그가 제시했던 링크와 연계, 자취와 웹은 우리의 현실에서 어떠한 특성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굿모닝! 미스터 오웰 혹은 백남준

 

Kit Galloway and Sherrie Rabinowitz, <Hole in Space>, 1980

 

   2018년은 세계 인터넷 역사에서 분기점을 이룬 해로 기록된다. 유엔의 14개 전문기구 가운데 하나인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 따르면, 세계 인터넷 이용자 수는 2018년 말로 세계 인구의 절반을 넘어선 것(51.2%, 39억명)으로 추정되었다. 또한 전 세계 인구의 약 96%는 모바일 셀룰러 네트워크의 범위 안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6) 이렇듯, 1996년 미국 국방성의 지원으로 미국의 4개 대학을 연결하기 위해 구축한 아르파넷(ARPANET)은 초기의 군사적 목적을 넘어 현재(혹은 현대)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환경으로 인식되고 있다. 아마도 오웰이 현재의 시점을 목도한다면 자신의 예견이 그리고 그러한 예견에 담겨있는 경고가 현실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 환경적 요인이 만들어졌음을 확인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예견처럼 인터넷이 기존의 현실(적 이데올로기)을 강화하는 대체재 역할만 수행한 것은 아니다. 이미 백남준이 <굿모닝 미스터 오웰, 1984>에서 지적한 것처럼, 우리의 통신망(인공위성 및 네트워크)은 현실의 한계를 넘어 상상 속에서만 가능했던 ‘연결’, ‘소통’의 가능성을 실체화하였다. 예술가들이 인터넷을 자신들의 창작 환경으로 주목하게 된 것 또한 이러한 기술적 가능성의 차원에 수렴한다. 물론 모든 기술 매체가 그러하듯, 인터넷은 스스로의 매체적 잠재성만으로도 미학적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다. 매체를 이용한 예술 작업의 경우, 해당 시기의 기술적 속성 자체를 작품의 의미 구조로 차용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할 수 있는데, 인터넷 아트 또한 초기에는 인터넷이 제공하는 ‘연결’, ‘소통’으로부터의 예술적 가능성에 주목하였다. 가령, 키트 갤로웨이(Kit Galloway)와 쉐리 레비노츠(Sherrie Rabinowitz)의 1980년작, <공간의 구멍 Hole in Space>는 LA와 맨허튼을 연결하여 각 도시의 시민들이 서로의 모습을 마주보게 만들었다. 단지 멀리 떨어져있는 장소의 사람들이 서로 마주하게 만드는 것이 작품의 주요한 내용이었지만 이 경험은 당시 꽤나 신선한 것이어서 다수의 관객들에게 전-지구적으로 연결되어 상호 소통하는 미래를 엿보게 만들었다. ‘원격현전(Telepresence)’으로 명명되는 이러한 형식의 작품은 백남준의 시도와 내용적으로 그 궤를 같이하며 ‘연결’ 그 자체가 제공하는 기술적 상상력을 우리에게 제공하였다.
   한편, 초기 인터넷 기술은 과거의 이원론적인 세계관(가상/실재)을 강화하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 그 경계를 해체하는 동시에 잠재적 실재를 가시화시키는 일종의 대안적 장으로 기능할 수 있음 또한 논의되었다. 미디어 이론가 권터 안더스(Gunther Anders)는 전통적인 현실과 가상의 이분법이 기술 매체에 의해 해체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TV 화면이 제공하는 이미지는 분명 현실 이미지이지만, TV가 놓여 있는 거실 속의 현실은 아니다. 그는 현실도 아니며 허구도 아닌 이러한 제 3의 존재층을 팬텀(Phantom)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는데, 그의 논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텔레비전은 이렇게 팬텀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허구이면서 동시에 사실로 등장하는, 그리하여 존재하면서 실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리얼리티를 만들어낸다. 과거에 모상은 원본이 되는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 제작되었다. 가령 역사화는 사건이 발생한 다음에 그려진다. 텔레비전의 영상 역시 역사화처럼 원본(原本)의 모상(模像)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V 영상은 역사화와는 달리 사건의 발생과 모상의 제작 사이의 시간적 간극을 없애버린다. 그리고 우리 앞에 모상도 아니고 원본도 아닌 형태로 ‘실시간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원본과 모상의 존재론적 차이는 사라지고, 모상 자체가 현실의 직접성을 가지고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현상한다. 모상, 그것은 곧 현실이다. “삶이 꿈으로 간주되는 곳에서는 꿈이 삶으로 간주되듯이, 모든 현실이 팬텀으로 등장하는 곳에선 모든 팬텀이 현실이 된다.” (7)
 
텔레비젼이 제공하는 세계는 일종의 허구이지만 현실이며, 실재하는 동시에 가상이다. 만약 전화가 과거로부터 무수히 시도된 원격 현전의 1차적 외연이라면 텔레비젼은 그보다 더욱 깊숙한 가상적 논의를 불러일으키는 장치가 될 수 있다. 원거리에서 존재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도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현상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텔레비전에서 이러한 원격현전과 가상화의 논의가 종결되지는 않는다. 텔레비젼은 결국 송신자와 수신자의 위치가 결정되어 있는 일-방향적 소통 매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큰 의미를 지니는데 시청자가 결국 자신을 투영하는 매체로서 텔레비젼을 인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그 속에서 펼쳐지는 가상 세계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자각을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텔레비젼은 완전히 현실과 분리된 가상의 미디어가 된다. 한편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는 텔레비젼의 미래에 관해 보다 적극적으로 관찰하였다. 그는 텔레비젼이 현재의 일방향적 한계를 넘어 '타인들과의 대화를 위한 창문으로서' 기능할 것이라고 예견하며 개방적인 그리고 쌍방향적 소통이 가능한 매체로 설명하였다.(8) 플루서의 이와 같은 견해는 텔레비젼이 가진 한계를 넘어 전화기의 기능과 융합된 새로운 미디어의 모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그가 제시한 텔레비젼의 새로운 모델은 현실과 가상의 이분법, 그리고 권터 안더스가 제기한 팬텀으로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텔레비젼이 지닌 강력한 가상성을 기반으로 수용자가 그러한 가상에 직접적으로 접속할 수 있는 환경적 토대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텔레비젼은 분명 이와 같은 노선을 걷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텔레비젼이 개척한 가상 세계의 바통은 인터넷이 건네받았다. 인터넷은 컴퓨터의 강력한 프로그래밍 환경을 기반으로 전 세계 어디에서나 접속이 가능한 그야말로 열린 환경으로 진화하고 있다. 초기부터 인터넷은 그 '연결성(Connectivity)'으로 크게 주목받았다. 연결성은 인터넷의 구조이자 의미 자체였고, 컴퓨터와 사람들, 센서들과 교통수단들, 전화기들과 빠르고 값싼 모든 것들의 연결을 가능하게 해주는 새로운 도구였다.(9) 따라서 인터넷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기존 체계를 전복시키는 이데올로기적 환경이자 이상적인 가상 사회상으로 인식되었다. 과거의 텔레비젼이 제시했던 현실과 가상의 이분법 해체가 드디어 현실 세계에서 구현된다는 믿음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발화권력의 전복, 대안적 장으로서의 인터넷

 


   1933년 7월 미국의 한 전화 전신 회사는 다음과 같은 인쇄 광고를 선보였다.
 
"당신의 전화(telephone)는 당신이다. 한순간 그것은 가깝거나 먼 여러 다른 곳에, 또 여러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이라는 존재를 퍼뜨리고 날려 보낸다. 바로 당신 자신의 일부가 모든 전화의 메시지 속에 있다. 당신의 생각들,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 미소, 당신의 인사말, 당신의 태도 그런 것들 말이다. 당신은 발화의 권력(the power of speech) 그 자체를 사용하듯이 전화를 사용하는데,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당신의 모든 부분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것을 쥐고 있는 한 당신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자가 된다. 당신은 비상시에 대처할 수 있고, 기회를 위해 준비되어 있으며, 많은 의견들을 받아들일 수 있고, 어떤 행동이라도 취할 자세가 되어 있는 것이다. 놀랄 만큼 특별한 사실은 당신이 전화를 사용하면 할수록 당신의 권력과 존재는 더욱 더 확장된다는 것이다." (10)
 
1861년 독일의 물리학자, 필립 라이스(Johann Phillip Reis)에 의해 전기 신호로 음성을 전달하는 '전화(telephone)'의 개념이 등장한 이후, 세계는 한층 더 가까워진 소통의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과거, 인간의 소통은 공간적 · 시간적 제약을 받았지만, 음성의 전기화는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은 까닭이다. 전화기의 발명은 분명 이전까지의 소통 시스템과 문화의 지형을 변화시켰고 우리는 그러한 소통 체계를 기반으로 새로운 매체적 진보를 꾀할 수 있었다. 시-공간은 가상화되었고 소통은 하나의 기능으로 점철되었다. 위의 광고 문구에서도 전화를 통한 소통의 기능성은 잘 드러난다. 그러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전화의 기능성을 피력하는 부분이 아니라, 그로부터 사용자의 존재가 확립된다고 주장하는 '발화의 권력'이란 표현에서이다. 다소 과장된 듯한 이 미사여구는 매체의 의해 사용자가 규정되고 또한 사용자 스스로가 매체와 합일하여 자신의 존재 및 정체성을 획득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전화라는 매체로 한정을 해보자면 이러한 표현은 왠지 과한 표현인 듯 보인다. 전화가 기존의 한계들을 허물었지만 여전히 전화는 음성을 기반으로 한 단일 매체였고, 그러한 매체의 단일성에 의해 소통 및 시-공간의 가상화는 스테레오 타입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넷은 종전 매체가 담당하던 텍스트(신문), 음성신호(전화기, 라디오), 이미지와 영상(TV) 등을 종합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총체적 장이 되었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특성이자 기존 매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상호작용적인 원격 의사소통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인터넷의 속성은 기존 신문과 TV 같은 매체와는 달리 통신 기술이 지닌 ‘복면효과’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데리다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유령의 "복면 효과"를 예로 들며 통신 기술의 속성에 대해 언급한다. 요약하자면, "복면"에 의해 만들어진 "비가시적인 것의 은밀하고 포착할 수 없는 가시성"이 착용자에게 "견줄 수 없는 권력", "보이는 것 없이 보는 권력",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는 권력을 제공한다는 것이다.(11) 예컨데, 주체는 대상을 볼 수 있으나 대상은 주체를 인지할 수 없는 환경적 선결 조건이 수행될 때, 역설적으로 주체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으며 그로부터 권력이 파생된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인터넷 아트의 역사가 시작된 지리적 장소는 유럽이었다. 특히 탈냉전 시대의 기술을 보유했고 민주주의를 막 정착시킨 동유럽에서 앞선 예술 형식과 미디어 행동주의를 위한 공간이 열리게 되었다.(12) 러시아의 인터넷 아트는 이러한 흐름의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인터넷 아트 Internet Art』의 저자 레이첼 그린(Rachel Greene)은 러시아에서 인터넷 아트의 실천을 고무시킨 요인으로서 세 가지 사실에 주목한다. 첫째로 상업 자본과 출판에 조정당하는 예술에 대해 러시아 예술가들이 보인 반응과 인터넷 기술이 맞아떨어졌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는 유럽과 미국에서는 처음부터 인터넷과 상업적 가능성이 긴밀한 관계를 맺은 반면, 러시아 예술가들은 인터넷을 통해 국경을 초월하여 소통하는 방법을 얻었고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인터넷을 재해석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세대의 예술가들이 뛰어난 러시아 아방가르드 영화의 역사로부터 내러티브와 스크린 중심의 시각 효과를 잘 훈련받았다. 이로 인해 인터넷의 상호 작용적인 가능성이 컴퓨터 스크린에서 확장되고 재고되었다.(13)

 

Vuk Ćosić, < Net.art per se>, 1996 (좌) / VNS Matrix, <The Cyberfeminist Manifesto for the 21st Century>, 1991 (우) 

 

   위의 설명에서 세 번째 요소는 과거 러시아의 예술적 유산이 이후의 예술가들에게 계승된 부분을 설명하는 것이므로 제외된다 하더라도 첫 번째와 두 번째 요소는 분명 인터넷이 가지고 있는 행동주의적 요소, 특히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대안적 통로로서의 역할이 강조된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부분은 비단 러시아 예술가들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은 아니었다. 가령, 뷕 코직(Vuk Ćosić)의 <넷 아트 그 자체 Net.art per se, 1996>의 경우 CNN의 홈페이지의 양식을 차용하여 대안적 미디어 채널의 모습을 제시하였으며, 일본의 ‘NTT 도코모’의 의뢰를 통해 제작된 히스 번팅(Heath Bunting)의 <커뮤니케이션은 불화를 불러온다 Communication Creates Conflict>의 경우 당시의 상업적 광고 및 상품화와 이로부터 파생되는 소통 문화 일반에 관한 비판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은 인터넷이 가진 대안적이며 상호 작용적인 기술적 환경에서 더욱 증폭되었다. 새디 플랜트(Sadie Plant)는 넷이 본질적으로 여성적인 속성을 지니며 계속해서 여성화되어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근거는 탈 중앙집권화 된 관계가 중심을 이루는 매트릭스가 넷 문화의 핵심이라는 데에 있었는데, ‘사이버페미니스트’라는 용어를 만든 오스트레일리아의 예술가 집단인 VNS 매트릭스(Matrix)의 <21세기를 위한 사이버페미니스트 선언 The Cyberfeminist Manifesto for the 21st Century, 1991>이나(14) 1998년의 ‘미스터.넷.아트 Mr.Net.Art' 대회와 같은 시도들은 그동안의 남성 중심의 문화를 전복시키는 상징적 시도로서 기억되고 있다.

 

 

내러티브의 재구성과 현실에 대한 해킹

Olia Lialina, <My Boyfriend Came Back From the War>, 1996

 

   만약 앞서 바네바 부시가 언급한 링크 및 연계가 원격현전의 기술을 통해 현실화 되었으며 그로부터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지점들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인터넷이 제공하는 자취-흔적 그리고 그것이 복잡하게 얽혀있는(web) 생태계에 관한 비전은 어떠한 형태로 현실화 될 수 있을까? 『인포메이션 아트 Information Arts』의 저자 스테픈 윌슨(Stephen Wilson)은 웹/인터넷의 독특한 원격 의사소통적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사항을 언급한다. ‘사람들 사이의 연결성(Connectivity between Persons)’, ‘협력과 그룹 작업(Collaboration and Group Work)’, ‘분배된 수집 자료의 창조(The Creation of Distributed Archives)’, ‘국제성(Internationalism)’, ‘웹 문맥에 코멘트하기(Comment on the Web Context)’가 그것인데,(15) 주목할 만한 항목은 마지막 항목(웹 문맥에 코멘트하기)이다. 이 항목은 앞서의 네 가지 항목과는 달리 기존 매체를 통해 수용할 수 없었던 영역이었다. 인터넷은 기존 매체와는 달리 사용자가 직접 매체에 의해 제공되는 콘텐츠로 접근할 수 있는 열린 환경이었으며, '코멘트하기'라는 행위를 통해 웹의 문맥, 내용 자체를 스스로 창조할 수 있는 능동성을 전제하고 있었다. 

 

Douglas Davis, <The World’s First Collaborative Sentence>, 1994~현재

 

   올리아 리알리나(Olia Lialina)의 웹 프로젝트인 <전쟁에서 돌아온 내 남자친구 My Boyfriend Came Back From the War, 1996>은 인터넷 사용자 스스로의 개인 이야기를 공론화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한 프로젝트였다. 간단한 그래픽과 텍스트로 이루어진 이 웹 페이지에는 전쟁에 참전한 남자친구라는 로맨틱한 소재가 등장한다. 사용자는 웹 프로젝트에 분할되어 숨어있는 이야기를 감상하며 직접 그 구조를 편집할 수 있었다.(16) 이러한 실험적 시도는 이전까지 제작자가 만들어놓은 이야기 구조 속에서 오로지 '감상'만 할 수 있었던 사용자를 창작자의 위치로 전이시켰으며 동시에 가상적 시-공간의 세계에 사용자가 진입할 수 있는 입구를 만들어놓았다. 이러한 변화는 이전까지의 내러티브를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하는데, 인터넷에 기반을 둔 하이퍼텍스트가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자들의 주장을 모두 충족시키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그 주장들을 실험할 풍부한 수단들을 제공한다는 점을 분명하다.(17) 주지하다시피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개의 고원 A Thousand Plateaus’에서 제기한 ‘리좀(Rhizome)’의 개념은 웹의 형태와 상당히 유사한 구조를 나타내고 있으며 책의 구조 또한 인쇄되어있는 하이퍼텍스트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천개의 고원’은 독자들이 스스로 순서를 결정하여 읽으라는 두 저자의 지시와 함께 시작되는데, 우리가 이와 같은 친절한? 지시사항을 대면했을 때 느끼는 당혹감은 기존의 인쇄문명에 의해 틀 지워진 스스로를 발견한 탓이기도 하다. 리좀의 개념은 이분법적 사고, 계보학, 위계질서 등과 같은 ‘수목형(tree) 구조’에 얽혀있지 않다. 오히려 감자나 딸기 식물의 뿌리 구조에서 발견되는 네트워크와 같은 복잡한 망 구조에 기인한다. 1994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는 더글라스 데이비스(Douglas Davis)의 <세계 최초의 합작 문장 The World’s First Collaborative Sentence>는 이러한 인터넷 미학의 상징을 잘 드러낸다.(18) 이 문장에는 주요한 저자도, 중심 생각도 당연히 위계적 체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TMark, <Barbie Liberation Organization>, 1993


   이러한 인터넷의 능동적 참여 환경은 수용자가 가상에 직접적으로 접속할 수 있는 환경적 토대를 제공할 수 있었다. 미디어에 의한 ‘시-공간의 가상화’는 사용자의 존재성 확립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현실 세계의 제약에서 벗어남을 의미하는 가상화는 문맥의 지배에 놓일 수밖에 없는 유약한 인간의 존재를 불변하는 존재로서 새롭게 잉태하기 때문이다. 이는 미디어가 수용자들의 지각방식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현실 자체의 존재론적 위상의 변화를 촉구할 것임을 시사한다. 몇몇 인터넷 아티스트들은 대담하게 현실을 가상의 세계 속에서 다른 양상으로 패러디하기도 하였는데, 아트마크(ⓇTMark)와 같은 예술가 그룹은 반기업적이고 인습 타파적인 예술 작업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1990년대 중반에 설립된 이래 아트마크의 대표들은 비공식적인 노선을 통해 연대한 여러 행동주의자, 예술가들과 함께 기발한 그래픽과 패러디 등을 선보이며 전략적인 활동을 펼쳤다. 또한 이러한 협조자들을 통해 언론 매체와 주요 도메인 사이트, 메일링 리스트들을 공략하는 기민함을 보이기도 하였는데, 2000년 미국 대선과 조지 부시(George W. Bush)를 겨냥한 가짜 사이트인 'gwbush.com', 성차별적인 장난감의 아이콘인 ‘바비(Barbie)’와 ‘G.I 조’를 풍자한 <바비 해방 조직 Barbie Liberation Organization, 1993>, 유명 컴퓨터 게임인 심스(The Sims)에 동성애적인 화면을 삽입한 <심콥터 해크 SimCopter Hack, 1997>등이 대표적인 작업이다.(19)

 

 

하나이며 다수인 잠재적 실재로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인터넷 아트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웹 생태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인터넷이 가진 매체적 잠재성을 실체화하였고 이로부터 현실 세계를 향한 예술적 시도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여전히 예술 분야에서 인터넷 아트는 비물질적인 형태에 기초하고 있으며 기술 집약적이고 매체 미학적인 요소에 기인하기 때문에 그것이 지닌 예술적 특성을 온전히 평가받고 있지는 못하다. 그럼에도 인터넷 아트가 (인터넷이 지닌) 기술적 특성을 바탕으로 과거의 단일한 소통 체계를 다원화하여 민주적 접근 가능성을 선보였으며 현실 세계가 규정하는 정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탈 중앙 집중적인 사회 구조에 대한 장밋빛 미래를 엿보게 만들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문학적으로 이들의 시도는 비선형적 서사의 원형을 제시하였으며,(20) 영상 예술 분야에서는 과거의 TV, 비디오 아트를 재구성하여 멀티 스크린을 활용한 확장 영화적 시도 및 관객의 선택을 통해 내러티브가 구성되는 상호작용적 영화에 이르는 지평을 마련해 주었다. 최근의 게임아트, VR/AR 아트 역시 인터넷 아트에서 시도되었던 현실과 가상의 경계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의 시도가 이후 세대들의 예술적 경향성을 확대시키고 증진시키는 데에만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이들의 바람 혹은 경고처럼 인터넷은 그야말로 모든 이들의 ‘기억’을 확장시키는 도구이자 현실의 요소들을 가상적으로 펼쳐놓은 상징적 ‘색인’이 되어가고 있다. 현실은 인터넷 세계와 유사하게 매우 하이퍼링크/텍스트 적으로 파편화되고 있으며 현실과 구분되었던 가상 세계로서의 인터넷 공간은 어쩌면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 규율에 지배받는 실재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인터넷 아트가 지닌 미학적 가능성은 과거에 완료된 것이 아닌 오히려 현대의 네트워크 문화가 마주할 수밖에 없는 혼성적 현실, 즉 하나이며 다수인 잠재적 실재, 그 어디쯤에서 여전히 발현되고 있다.  

 

 

2019년 1월 서울시립 북서울 미술관 <Web-Retro>展 공동기획 / 전시서문

 

 

*references

 

해외문헌

Bolter J. David, Writing Space: The Computer in the History of Literacy, Hillsdale,
N.J.:Lawrence Erlbaum, 1990
Gunter Anders, Die Welt als Phantom und Matrize, München:Beck, 1987
Julian Stallabrass, Internet Art, Tate Publishing, 2003
Roland Barthes, trans. Richard Miller, S/Z, New York: Hill and Wang, 1974
Stephen Wilson, Information Arts, The MIT Press, 2002

국내문헌

레이첼 그린, 이수영 역, 『인터넷 아트』, 시공아트, 2008
마크 포스터, 김승현, 이종숙 역,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날기 전에 인터넷을 생각한다』, 
이제이북스, 2005
빌렘플루서, 김성재 역, 『피상성 예찬』, 커뮤니케이션 북스, 2006
조지 P. 랜도우, 『하이퍼텍스트 2.0 : 현대 비평이론과 테크놀로지의 수렴』, 문화과학사, 2001


웹사이트

Memex and Beyond Web Site

cs.brown.edu/memex/bibliography.html

“As We May Think”, The Atlantic, July, 1945

www.theatlantic.com/magazine/archive/1945/07/as-we-may-think/303881/

Douglas Davis: The World’s First Collaborative Sentences

whitney.org/artport/douglas-davis

 

버니바 부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o.wikipedia.org/wiki/%EB%B2%84%EB%8B%88%EB%B0%94_%EB%B6%80%EC%8B%9C

"세계 인터넷 사용자 39억명"...인구 절반 넘어, ZDNet Korea, 2018.12.10.

www.zdnet.co.kr/view/?no=20181210104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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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네바 부시가 제안한 메멕스(Memex)라는 개념은 기억 확장 장치(Memory Extender)의 합성어이자 종종 기억(memory)과 색인(index)의 혼성적 합성어로도 이해된다. 바네바 부시는 사실 1939년에 미리 작성해 두었던 이 글을 1945년 ‘더 아틀란틱(The Atlantic)에 발표한 것이었는데 일반적으로 인터넷이 개발되어 사용된 것이 1980~90년대였음을 상기해보면 매우 앞서있는 개념임에 틀림없다. 그는 더글러스 엥겔바트, J.C.R. 리클라이더, 이반 서덜랜드 등 한 세대에 걸친 컴퓨터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현대 정보 사회가 성립하는 데에 촉매 역할을 한 것으로 기억된다.

ko.wikipedia.org/wiki/%EB%B2%84%EB%8B%88%EB%B0%94_%EB%B6%80%EC%8B%9C

 

버니바 부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버니바 부시(Vannevar Bush, /væˈniːvɑr bʊʃ, 1890년 3월 11일 ~ 1974년 6월 30일)는 미국의 기술자이자 아날로그 컴퓨터의 선구자이다. 역사적으로 부시는 2차 세계 대전

ko.wikipedia.org

   , “As We May Think”, The Atlantic, July, 1945

www.theatlantic.com/magazine/archive/1945/07/as-we-may-think/303881/

 

As We May Think

“Consider a future device …  in which an individual stores all his books, records, and communications, and which is mechanized so that it may be consulted with exceeding speed and flexibility. It is an enlarged intimate supplement to his memory.”

www.theatlantic.com

(2) 조지 P. 랜도우, 『하이퍼텍스트 2.0 : 현대 비평이론과 테크놀로지의 수렴』, 문화과학사, 2001, pp. 24~25.

(3) Roland Barthes, trans. Richard Miller, S/Z, New York: Hill and Wang, 1974, p.4.

(4) 조지 p. 랜도우는 <하이퍼텍스트 2.0>에서 이러한 다연속적인 텍스트로서 인문학이나 물리학에서의 표준적인 학술논문을 제시한다. 가령,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Ulesses)에 관한 논문에서도 글 안에서 문장을 인용한 것을 포함하는 각주나 미주가 그러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예시한다. 조지 P. 랜도우, 같은 책, p.15 참조.

(5) Bolter J. David, Writing Space: The Computer in the History of Literacy, Hillsdale, N.J.:Lawrence Erlbaum, 1990, p.143.

(6) "세계 인터넷 사용자 39억명"...인구 절반 넘어, ZDNet Korea, 2018.12.10.

www.zdnet.co.kr/view/?no=20181210104326

 

"세계 인터넷 사용자 39억명"...인구 절반 넘어

올해 전세계 인터넷 사용자 수가 사상 최초로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을 것이라는 통계가 나왔다.지난 7일(현지시간) 국제연합(UN) 산하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은

zdnet.co.kr

(7) Gunter Anders, Die Welt als Phantom und Matrize, München:Beck, 1987, p.143.

(8) "오늘날의 텔레비전 방송 혹은 오늘날의 체신 및 전화망에 참여하는 것과 똑같이 많은 대화 상대방들이 참여하게 될 개방된 텔레비전 망에 이르는 데 성공했다면, 사회이 구조는 근본적으로 변화되었을 것이다.", 빌렘플루서, 김성재 역, 『피상성 예찬』, 커뮤니케이션 북스, 2006, p.209.

(9) Stephen Wilson, Information Arts, The MIT Press, 2002, p.562.

(10) 마크 포스터, 김승현, 이종숙 역,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날기 전에 인터넷을 생각한다』, 이제이북스, 2005, p.184.

(11) 마크 포스터는 데리다의 비유에서 나타나는 복면의 물질성이 현재의 통신 기술들을 소유하고 있는 20세기 말에 있어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포스트모던한 가상성’, 즉 물질성의 재구성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마크 포스터, 같은 책, pp.204~208 참조.

(12) 레이첼 그린, 이수영 역, 『인터넷 아트』, 시공아트, 2008, p.12.

(13) 앞의 책, pp.48~49 참조.

(14) 앞의 책, p.86 참조.

(15) Stephen Wilson, 같은 책, pp. 560~561 참조.

(16) Julian Stallabrass, Internet Art, Tate Publishing, 2003, p.58.

(17) 조지 P. 랜도우, 같은 책, p.58.

(18) 이 작품은 1994년 런칭, 2013년 복원되어 현재 휘트니미술관의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으며 현재에도 참여자들이 자신의 코멘트를 남겨놓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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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glas Davis: The World's First Collaborative Sentence Launched 1994, Restored 2013

"The Sentence has no end. Sometimes I think it had no beginning. Now I salute its authors, which means all of us. You have made a wild, precious, awful, delicious, lovable, tragic, vulgar, fearsome, divine thing." —Douglas Davis,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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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레이철 그린, 같은 책, pp.128~132 참조.

(20) 비선형적 서사 혹은 이로부터 파생된 사고의 보편적 중요성은 바르트와 다른 비평가들이 링크, 네트워크, 웹, 경로 등을 자주 인용하고 중심적으로 다루는 데서도 나타난다. 오늘날의 그 어느 이론가보다도 데리다가 하이퍼텍스트와 관련되는 연결점, 웹, 네트워크, 발생지(matrix), 짜임(interweaving)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바흐친 또한 링크, 연계, 상호연결, 상호짜임(interwoven)등의 용어를 사용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조지 P. 랜도우, 같은 책, pp.69~7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