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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준의 문화/예술 비평
Apmap 2018 : 숭고와 시뮬라크르,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본문
낯익은 제주, 다르게 보기
올해만도 벌써 5번째, 제주로 이동하는 비행기 속에서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린 제주에 관한 기억을 더듬어본다. TV와 라디오를 통해 제주의 풍경을 예찬하는 프로그램과 노래들에 이미 익숙해져버린 제주는 누군가에게는 일상을 벗어나 잠시 머무르는 장소이자 동시에 또 다른 이들에게는 삶의 터전이 되어왔던 장소이다. 제주의 이러한 이중성은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에게는 매혹적인 요소가 된다. 단순히 관광지로서의 의미만이 아닌 거주지로서의 가능성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섬, 그것이 제주이다. 다만 그러한 특성이 제주의 자연적 특질에 기인함을 상기해보자면 이곳을 기반으로 정착하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제주는 그리 녹록치 않은, 매우 변덕스럽고 고약한 섬일 뿐이다. 제주는 약 180만년 전에서 1,000년 전까지의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화산섬이다. 8개의 유인도와 71개의 무인도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심의 한라산을 기점으로 용암이 겹겹이 쌓이면서 만들어낸 퇴적층이 영토의 주요한 부분을 구성한다. 굳이 외부의 평가가 중요할까 싶지만, 제주는 전 세계 203건에 불과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되기도 하였는데, 등재된 곳은 한라산 천연보호구역, 성산일출봉, 거문오름 용암동굴계로 제주도 전체 면적의 약 10%를 차지한다. 이와 같은 제주의 세계자연유산 지정은 다분히 그 자연적 특성과 가치를 인정함에 기인하겠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그만큼 보호해야 하는 연약한 토양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다. 제주는 여전히 변화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새로움을 담보하는 원천적 자연이지만 이미 인공적 손길에 익숙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제주는 우리에게 신비로운 섬으로서 인식되기 보다는 일상적인 관광지로서의 상징적 의미를 획득한 채, 의미가 고정되어버린 일종의 사건 혹은 또 다른 현상으로서 존재한다.
자연이 그 자체로 예술적 감상의 대상이 될 때, 그것에 관한 비일상적 경험은 생각보다 큰 힘을 갖는다. 자연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언제나 경험할 수 있는 무엇이지만 일상 밖의 영역에서도 마주할 수 있었다. 특히 일상적이지 않은 자연 풍경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감각은 기존의 미적 경험을 상회하는 그리하여 불쾌의 감정마저 유발시키는 보다 넓은 범주의 미, 즉 숭고(The Sublime)로 정의되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이 일상적 사건 또는 현상으로 전환되는 순간, 그러한 숭고는 미적 지각의 대상으로 회귀한다. 특별한 의미의 장소(place)에서 일상적 공간(space)으로의 변화이다. 이러한 맥락에 제주를 대입해보면 제주는 빠른 속도로 그 신비로움을 잃어가고 있다. 그것의 좋고 나쁨을 헤아려보기 전에 제주는 우리의 일상으로 침투한다. 이러한 현상은 두 가지의 대조되는 특성을 보인다. 첫 번째는 관광지로 상품화되는 제주이다. 제주의 자연과 역사, 문화와 언어 등 모든 것이 상업적 이미지로 박제된다. 이러한 이미지 속 제주는 환상적이고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는 그것이 제공할 수 있는 ‘차이’를 극대화시키는 데에 집중한다. 즉, 비일상적 경험이 확장되는 것이다. 동시에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상 속으로 침투하는 제주의 모습 또한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비행기로 1시간 남짓이면 도달할 수 있는 일일생활권이자 각종 현대화된 시설들로 둘러싸인 채 도시의 삶과 괴리되지 않는 제주의 일상은 매스컴을 통해 지속적으로 소비된다. 문제는 비일상과 일상을 각각 극대화시키는 이 두 가지의 상반된 흐름이 제주에 관한 우리의 시각을 단편적으로 고정시켜 버린다는 점이다. 즉, 실제로 그것을 마주하기 전부터 이미 우리의 인식 속에 존재하는 제주의 자연은 이 곳을 떠올리는 이들에게 숭고의 감정을 전달하기는커녕 익숙한 미적 대상으로 혹은 상업적 이미지로서 각인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익숙해져 버린 제주의 자연을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마주할 수 있을까?
현대 예술은 미적 경험의 극대화를 위해 두 가지의 전략을 주요하게 사용하였다. 첫 번째는 숭고의 미를 부각시키는 방식이고 두 번째는 시뮬라크르(simulacre)를 정밀하게 다듬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두 가지 방식 모두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을 기반으로 작동되지만 그 과정은 사뭇 다르다. 숭고미의 경우, 그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작가들은 자신들의 작품과 관객과의 거리를 설정하곤 하였는데, 색면 추상의 대표 작가인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경우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는 이상적 거리를 45cm로 설정하였다. 그는 이러한 거리로부터 자신이 작품을 제작할 때 경험했던 (종교적) 감성을 관객들도 마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는 관객들이 거리를 두고 작품을 감상할 경우 작품의 요소들이 지닌 관계성으로부터 특정 의미를 구성하고 작품을 의미 안에 고정시키는 결과를 억제하는 효과도 발생시켰다. 따라서 숭고의 감정은 대상과의 거리감을 통한 재설정이 가능하며 대상의 의미 구조에 천착할 때 오히려 그 순수성이 훼손됨을 파악할 수 있다. 만약 제주의 자연을 이러한 맥락에 대입해보자면 이미 원거리로부터 상징화된 제주(자연)이라는 대상체는 거리감으로 대변되는 대상과의 다른 관계 설정으로부터 원초적 숭고미에 관한 복권을 기대할 수 있다. 가령, 절대적 크기를 지닌 자연의 모습이 우리에게 숭고의 미를 전달한다고 가정해보자. 만약 이러한 상황이라면 관람객의 위치가 대상에 대한 미적 경험과 숭고의 경험을 결정하게 된다.
자연(성)과 인공(성) 사이에서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는 과거 자연적 대상에 집중되었던 숭고 개념을 자연이 아닌 예술로 이전시켰다. 그는 “우리가 생각할 수는 있으나 볼 수 없는 그리고 보이게 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 바로 여기에 현대 회화가 추구하는 목표가 있는 것”이라 역설하는데, 잃어버린 제주의 숭고(미)를 되찾는 방식에 관한 단서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미 제주 자연의 모든 정보(상태와 현황, 크기와 색채 등)가 시각화되어 공유되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 이러한 익숙함으로도 추적하지 못하는 제주 자연의 흔적을 현대 예술을 통해 엿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이다. 예술은 그 시작부터 자연을 모방한 인공적 환경이었다. 앞서 현대 예술이 구사하는 시뮬라크르적 전략에 관하여 언급하였지만, 이는 어떠한 측면에서는 숭고와 마찬가지로 예술의 본질에 해당한다. 그러나 칸트와 료타르의 숭고 개념의 결정적 차이를 그것의 본질이 자연적 대상으로부터 기인한 것인지 혹은 인공적 토대에서 발생하는 것인지에 관한 것에서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제주의 자연과 그것을 모티브로 제작한 예술이 제공하는 숭고의 성질은 그 결이 구분될 수 있다. 특히 예술이 근대 이후 기술 매체를 받아들이며 이러한 자연성-인공성의 구분은 보다 세분화된 인식적 범주를 갖게 되었는데, 예술의 주체와 대상은 자연적인 것에서 인공적 기술 매개체로 변화하게 된다. 즉, 자연적 주체와 대상으로 한정되었던 기존 예술의 개념에서 벗어나 인공적 주체가 자연적 대상을 혹은 자연적 주체가 인공적 대상을 묘사하는 새로운 구도가 가능해졌다. 다만 이러한 자연적 혹은 인공적 주체를 구분하는 근거에 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자연물과 인공물을 “그 자체 안에 변화와 정지의 원리를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로 판단한다. 이러한 구분은 최근의 인공지능과 같은 기계 대상체의 자율-행동으로부터 거센 도전을 받고는 있지만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인공의 구분을 위한 주요한 기준으로 작용했다. 만약 이러한 기준에 숭고의 개념을 적용해보면 인공적 예술은 자연과는 달리 스스로의 변화/정지의 원리를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표현으로서 일종의 ‘사건’에 주목하며 이를 시도한다. 즉, 하나의 시뮬라크르를 형성하여 그 속으로부터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 대상이 제공하는 것과는 구분될지 모르지만, 자연을 경험하며 포착하기 힘든 미묘한 지점이 예술의 체를 통해 나타난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apmap 2018’의 전시 주제는 ‘제주의 자연’이다. 지난 해, 주제를 ‘제주의 신화와 전설’로 설정하여 제주가 품고 있는 역사적 이야기와 탄생 비화들을 풀어놓았다면 이제야 제주의 자연에 도착한 셈이다. ‘apmap(amorepacific museum of art)’이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이며 ‘part II’가 제주를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점, 그리고 제주를 떠올리고 방문하며 이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이들의 주요한 특성이 제주의 자연에 근거한다는 부분을 상기해보면, 금년의 주제는 피할 수 없는 필연적 주제라 할 만하다. 오히려 작년의 주제인 ‘신화와 전설’이 ‘제주의 자연’에 앞서있다는 점이 의외인데, 만약, 제주의 자연을 단순 사건이나 현상이 아닌 ‘과정’으로 사유해보자면 전년도 주제와 올해의 주제는 의미적으로 매우 밀접하게 연결된다. 제주의 신화와 전설은 그 지형적 특성과 연동되기에 제주의 자연-신화-전설은 한 몸체에서 잉태된 과정적 현상인 까닭이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apmap 2018은 15팀의 현대 예술가들이 참여하여 제주의 자연을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이는 프로젝트이다. 건축가 및 회화, 미디어아티스트로 구성된 다양한 참여 작가들은 널리 알려진 제주의 모습들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포착하고 이를 해석하여 다시금 매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얼핏 살펴보면 한라산과 오름, 바다와 화산, 곶자왈과 용암동굴, 주상절리 등 제주를 대표하는 특이한 자연적 요소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공공미술 혹은 대지미술이 그것이 딛고 있는 장소를 중심으로 일종의 인공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라 한다면 제주는 이러한 측면에서 매우 완벽한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자 숭고의 진원지라 할 수 있다. 제주도를 현대미술의 섬으로 변화시켜보려는 아모레미술관 및 유관 기관들의 시도는 이러한 맥락에서 매우 타당하다. 다만, 예술가들에게 이러한 지점은 오히려 부담이 될 수 있다. 그저 보기만 해도 아름다운, 그 자체로 예술로 인식되는 제주의 자연을 다시금 매개하여 풀어놓는다는 것은 매우 부담되고 고된 작업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말장난처럼 들리는 ‘형용할 수 없는 제주-자연에 관한 (예술의) 형용 시도’는 앞서 료타르의 지적처럼 그 자체로 현대 예술이 감당해야하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란 명제로 귀결된다. 여기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이요 표현하기의 주체는 예술이 되는 것인데, 그 무게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금년의 apmap 출품작들은 이러한 부담감을 어떠한 방식으로 헤쳐나가고 있을까? 필자는 이번 apmap의 작품들을 크게 두 가지의 방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자연의 재매개를 통한 ‘숭고’의 복원이라는 측면이고 두 번째는 ‘시뮬라크르’로서의 인공적 환경을 통해 자연을 재구성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두 가지 방향 모두 제주의 자연을 기반으로 한 재현적 성질을 바탕으로 한다. 다만, 자연을 재구성하는 측면에서 자연에 관한 (부분적) 포착으로부터 본래의 자연이 지닌 특성을 발현시키느냐 혹은 인공적 환경 구성을 강조하느냐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자연에 관한 접근방식에 있어서의 구상-추상적 특성과 유사할지 모르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우선, 자연을 매개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에 있어 구상과 추상의 방식은 모두 사용될 수밖에 없다. 자연을 연상시키게끔 구상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이나 특정 지점을 포착하여 추상적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 모두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시뮬라크르를 구성하는 방식의 경우 인공적 환경이 지닌 그 자체로서의 완성도를 살펴봐야 한다. 아무래도 재현적 요소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닌 만큼, 그것이 지닌 (인공) 환경적 완성도가 제주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주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먼저 제주의 자연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정지현의 <애돌개>를 살펴보자. 이 작품은 제주의 ‘외돌개’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두 개의 거대한 바위로 구성된다. 외돌개는 서귀포시 삼매봉 남쪽 기슭 바다 한가운데에 둘레 약 10m, 높이 21m의 기암으로 약 150만년 전에 화산이 폭발하여 용암이 섬의 모습을 변화시키며 생성된 지형이다. 바다 한 복판에 바위 기둥이 홀로 솟아있으니 이름 그대로 외로운 돌섬이다. 정지현 작가는 정해진 시간에 바위를 상하, 좌우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파도에 의해 외돌개의 풍경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작가의 작품은 느리게 움직이는 바위를 통해 그러한 순간을 묘사한다. 이러한 요소는 김명범의 <중첩>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정방 폭포를 소재로 제작된 이 작품은 폭포를 연상시키는 직접적인 대상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폭포수가 떨어져 발생하는 담수와 해수가 만나는 그 순간을 포말과 물결의 형상화를 통해 전달한다. 한편 홍범의 <가리워진 결과 겹>은 마치 관객이 사려니 숲 혹은 곶자왈에 와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숲이 제공하는 다채로운 느낌을 제대로 전달한다. 작가는 제주에 자생하는 풀과 꽃, 곤충으로 숲의 지도를 그린 후 이를 형상화한 아크릴 판들을 겹겹이 쌓아올려 작품을 구성하였는데,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쌓여진 제주 자연의 층위를 제시하고 있다. 만약 홍범의 작업이 시간을 압축하여 다층적 레이어 구조 속에 집약시킨 것이라면, 김가든의 <빛의 순환>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빛의 미묘한 순간들을 오설록 실내 공간에 늘어놓았다. 바닷물과 용암지질대를 상징하는 아크릴 패널들은 고성리 광치기 해변의 조간 풍경을 구성하고 있는데, 정면에서 응시할 때 보이는 시간의 연대기적 구성은 작품의 측면으로 위치를 변화시킴에 따라 자연스럽게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을 마주하게 한다. 자연의 요소를 상징적으로 차용하여 재현하는 특성은 이성미의 <크리스탈 드림>에서도 만나볼 수 있는데, 이 작품의 모티브는 제주 김녕리의 만장동굴이다. 제주에는 세계적 규모의 용암동굴 80여개가 분포하고 있는데 용암동굴에는 그것의 형성 배경으로부터 다른 동굴들과는 구분되는 특색이 즐비하다. 이 작품은 그러한 특성 중에서도 용암동굴에서 발견되는 용암 석순과 석주를 형상화하고 있으며 작은 연못과 같은 장소에 설치가 되어 본래 자연의 모습이 연상된다.
추상적 언어와 시뮬라크르
앞서의 작품들이 구상적 태도를 견지하며 자연을 재매개하였다면, 보다 추상적 언어로 작품을 표현한 작가들도 있다. 이 경우, 자연의 요소를 추상화하는 보편적 과정을 통해 결과물을 표출한 작가도 있지만, 현재 존재하지 않는 자연의 풍경을 예술적으로 매개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추상성이 획득된 작품 또한 존재한다. 가령, 임승천의 <프랙탈>과 문연욱의 <제주 20180422-63547>은 두 작품 모두 ‘주상절리’라는 제주의 대표적 자연 현상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주상절리의 현상 자체가 화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지표면에 흘러내리며 식게 되는 과정에서 생성된 규칙적 균열인데, 이러한 자연의 규칙성을 두 작가는 모두 추상적 언어로 매개한다. 다만 임승천은 자기-유사성을 지닌 프랙탈 구조로서 주상절리의 규칙성을 알고리즘 적으로 구현하고 있으며 문연욱은 좀 더 보편적인 리듬감으로부터 기하학적 추상의 특성을 보여준다. 반면 현재 존재하지 않는 자연적 현상을 작품으로 구현한 작가들도 있는데, ADHD의 <켜>와 Bo-daa의 <액체암석>, 최성임의 <황금낭>은 용암의 물성변화와 흐름에 주목하여 제작된 작품들이다. 수직적 철 프레임이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ADHD의 작품은 흘러가는 용암의 흐름을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사실 작가가 주목하는 용천동굴은 이러한 과거의 자연 현상 및 변화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지만, 일상적으로 마주하기 힘든 풍경이기에 작품은 일견 추상성을 갖게 되지만 그럼에도 작품의 외형으로부터 자연적 현상을 떠올리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이러한 특성은 Bo-daa의 작품에서도 나타나는데, 용두암 주변의 크고 작은 연못을 파빌리온의 형태로 구축한 이 작품은 바람의 도움을 받아 빛을 산란시키는 연못의 표면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황금낭>은 제주 자연의 탄생 배경을 물과 불이라는 요소로 상정하고 지면에서 수직으로 올라오는 황동 봉을 통해 불의 속성을, 그 위에 쌓여진 아크릴로부터 물의 성질을 구현하였다.
만약, 위의 작품들이 자연의 모습 중 특정 지점이나 영역 혹은 시간적 경과를 포착하여 그것을 다른 장소에 재배치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라면, 이는 앞서 (예술적) 숭고미의 조건으로 언급했던 관객과의 거리를 재설정함과 동시에 본래의 장소에서 이탈하여 발생하는 일종의 사건으로서의 효과를 제공한다. 다만, 시뮬라크르로서 자연을 재구성하는 작품들은 사건의 현장으로서의 특성을 온전히 부여하게 되는데, 여기서 작품의 자연적 모티브가 희석되거나 휘발되는 특성 또한 나타나기도 한다. 윤하민의 <풍덩>은 이러한 지점에서 작품의 근원지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작가는 생명수를 품은 곶자왈 땅 속의 풍경을 지면 위로 불러오고자 바닷가의 안전 전망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와는 별개로 이 작품이 땅 속 풍경의 시뮬라크르로 존재하기는 어렵다. 의미들 간의 보폭이 생각보다 넓기에 그 간극을 쫓아가기가 버거운 탓이다. 박길종의 <나무 넘어 나무다>는 기능적으로 청수 곶자왈의 환경을 구현한 경우이다. 작가는 4개의 원기둥 구조물을 이용하여 오설록을 찾는 이들에게 작은 쉼터를 제공한다. 반면 이용주의 <접는 집>은 자연의 현상을 건축의 언어로 변환시켜 일종의 인공 거주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주상절리의 수직 기둥 패턴에서 알고리즘을 추출하여 건축 외피에 적용하였다. 이는 김상진의 <전기 동굴>이 보여주는 자연 해석과는 상당히 대조되는 지점인데, 이용주가 제주 자연을 외형적 패턴으로 이용하였다면 김상진은 (겉모습은 전혀 이질적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것의 중심으로부터 발생하는 용암 동굴의 낙수 소리를 이용하여 동굴 환경을 인공적으로 구현했다. 마지막으로 이예승의 <점 선 면 그리고 바람>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의 자연 환경을 총체적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각각의 요소들은 제주 자연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작가는 이러한 요소들에 디지털 및 아날로그 매체를 투입시켜 공감각적 경험을 극대화시킨다.
15팀의 작가들에 의해 재탄생한 제주의 자연은 원천적 자연이 지닌 숭고의 미덕으로 혹은 그것의 인공적 시뮬라크르로서 나타났다. 물론 이러한 구분은 작품 군을 분류하기 위한 편의적 사항에 가깝지만, 재차 생각해보면 우리가 자연을 마주하는 자세와 그것을 경험하는 방식에서도 유사한 규칙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우리의 사유의 지평으로 가져오기까지 자연은 그대로 멈춰있지 않는다. 때로는 변화무쌍한 실체적 자연으로 때로는 각자의 목적으로 이미지화된 상징적 자연으로 그 모습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제주라는 장소 그리고 그 장소에 깃들여있는 자연의 모습은 견고한 항구성으로만 기억되기에는 탄력적인 생명체로서의 다양성을 내포한다. 따라서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제주의 모습에 탄식을 자아내는 이가 있다면 다시금 제주를 방문하라 권하고 싶다. 그리고 연이 닿아 그것을 닮아있는 예술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면, 제주는 우리에게 아직 꺼내 보여주지 않은 이면을 흔쾌히 선사할 것이다.
Apmap 2018 전시 도록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