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준의 문화/예술 비평

가상/증강현실의 해체적 이해 : 보충과 재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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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증강현실의 해체적 이해 : 보충과 재편

yoo8965 2015. 2. 23. 11:08



1. 매체를 통한 시-공간 개념의 변화

 

과거로부터 매체가 현실의 시간과 공간 개념을 변화시켜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현실이 시공간적 궤적에 의해 이해된다면, 가상-증강 현실에 관한 논의도 기존의 시공간적 한계와 결부지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논의를 좀 더 구체적으로 분류해보자면, 기존 물리적 현실의 시-공간 개념과 가상/증강 현실의 공간의 차이점과 연결점을 분석해야하며, 이로부터 현재의 시-공간 개념이 어떻게 현실의 그것으로 종합되고 있는가를 논의해야 한다. 결국, 그것이 현실의 개념으로서 귀결되거나 종합되지 않는다면, 과거 플라톤이 언급한 동굴의 비유처럼 관념적 수준에서 머무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가상현실, 증강현실에 관한 사유가 필수불가결한 매체론적 혹은 현실에 관한 인식 과정으로서 논의되는 까닭은 과거로부터 인류가 추구해 온 현실의 절대적 시-공간 개념에 의문을 제기해 온 철학적 관념들을 실체화 시켰기 때문이다.

 

가상현실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디지털 미디어의 특성을 고스란히 내재한다. 따라서 멀리 있는 그리고 시간의 경과를 거슬러 현존할 수 있다는 속성을 기반으로 지금 여기의 실체적 공간과 구별된다. 이러한 가상현실은 따라서 현실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아무리 실재 공간에 그 인식적 근거를 지닌다 하더라도 말이다, 가상현실 공간은 우리가 마주하는 실체적 공간을 다른 맥락에서 읽혀지게 만든다. 만약, 철도와 통신기술의 발달이 근대의 시-공간의 개념을 재편시켰다면, 현재의 디지털-가상 기술들은 재편된 근현대의 시-공간 개념을 다시금 해체시킨다. 근대의 철도가 이전의 공간 개념에서 사이 공간 Zwishenraum’을 소멸시킨 것과 유사하게 현재의 디지털 매체들은 우리가 지닌 시간과 공간의 근본적 부분을 분절이 가능한 파편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예를 들어, 원격통신 기술은 거리의 문제를 소멸시켰으며, 실시간이란 요소는 시간의 간극을 해체시킨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이 제공하는 해체는 파괴를 의미하는 해체[distruction]이 아닌 탈구축[de-construction]적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탈구축은 기존의 구축적-구조적 문맥에서 벗어나게 하는 힘을 일컫는데 디지털 기술에 의한 가상/증강 개념의 경우, 우리가 실재하는 공간에 새로운 기술-매개적 공간을 덧씌우는 방식으로 파생되기 때문이다. 매체철학자인 키틀러(Friedrich Kittler)는 새로운 기술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실재계를 명확히 드러내 준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의 인지과정이라는 체로 걸러지지 않았던 요소들이 인식을 넘어 실재하고 있음을 기술-매체를 매개로하여 파악되는 상황을 일컫는 것인데, 가상/증강 현실 기술들은 키틀러의 주장처럼 우리의 현실적 요소들을 가시적으로 만드는 작용과 함께 오히려 우리의 인식을 상회하는 상상계의 공간을 실재계로 만들어 버리는 역할까지 수행한다.

 

 

2. 가상과 증강이라는 두 개의 수식 : 실재계와 상상계

 

디지털 매체는 지시 근거를 필요치 않는, 즉 원본과 대상 없는 이미지들을 탄생시켰다. 철학적 용어로 서술하자면, 세계가 추구해야할 원본, 즉 이데아의 세계가 본질적으로 필요치 않게 된 것이다.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우리 사회가 가상과 진리, 가상과 본질 사이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시뮬라르크가 지배하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에서 가상증강이라는 두 가지 요소는 현실에 대한 이중적 수식으로 존재한다. 이는 전통적으로 재기되어온 존재론적 문제, 즉 본질과 현상이라는 논제를 다시금 떠올리게 만든다.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는 가상적이라는 말을 '아직 현실이 되지 않은 그러나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레비(Pierre Levy) 또한 이러한 차원에서 가상의 개념을 현실의 잠재태 개념으로 이해하는데,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가상의 의미가 곧 현실의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가상에 관한 과거의 관념적 상상은 우리에게 두 가지 차원의 현실적 잠재태로 나타났다. 바로 현실이라는 본질이 두 가지의 현상으로 발현되고 있는 셈이다. 만약, 앞서 언급한대로 가상/증강 현실 기술이 우리의 실재계와 상상계를 가시적으로 드러낸다고 전제해본다면, 증강현실은 실재계를 보충하는 상상계적 기술로서 존재하며, 가상현실은 기존의 상상계를 재편하며 실체화된다. 최근 등장하고 있는 기술적-예술적 시도들은 이를 우리 앞에 선명하게 제시한다.

 

시각예술가인 토마스 소텐즈(Thomas Soetens) 와 건축가인 코라 반 덴 버클(Kora Van Den Bulckle)로 구성된 워크스페이스 언리미티드(Workspace Unlimited)는 현실의 공간을 가상적으로 확장시키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선보여왔다. 그들은 스크린 속 가상 세계가 더 이상 스크린 속에서만 머무는 상상계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실재하는 현실과 맞닿을 수 있다는 주장을 작업을 통해서 선보인다. [그들은 이러한 개념을 Hybrid Space라 지칭한다.] 2011년작 <Realtime Unreal>은 가상의 개념이 공간적인 차원으로 국한되지 않고, 시간적 속성과 결합할 경우 보다 다층적인 의미를 생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 번에 한 사람의 관객만을 수용하게끔 디자인된 이 작품은 관람객의 움직임에 의해 시점이 변화하며 서로 다른 입체적 이미지들의 조합을 경험케 만든다. 흥미로운 점은 실제 공간과 디지털 이미지 공간을 연계시켜, 관객들 스스로가 위치하고 있는 시공간적 관념을 흔들어 놓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크스페이스 언리미티드의 작업은 역설적으로 가상과 실재의 이분법적 논리를 드러낸다. 현실 공간의 확장으로서의 스크린이 여전히 가상의 공간이 매개되어 있음을 경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작가인 전지윤이 제시하는 일련의 작품들은 오히려 현실에 기반을 둔 오브제/이미지를 통해 상상계의 영역을 현실로 불러들인다. 인쇄된 책을 넘기는 아날로그적 행위가 AR 기술과 결합하여 제시되는 <UnconciousParallels>는 현실이라는 실재계에 관한 우리의 인식과 관객 스스로의 기억이라는 상상계를 융합해버린다. 또한 기존의 예술 작품이 지닌 틀을 재매개하는 <Rake Out>은 이러한 기억과 감정을 분절시켜 다층적 메시지 구조로 드러낸다. 그러나 AR은 현실이라는 실재계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기억 또한 분절될 수 밖에 없는 것임을 반추하게 만든다.

 

이제 우리는 가상과 증강이라는 두 개의 수식을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 속에서 사용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도들이 여전히 기술적 매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모든 매개물이 지향하는 최종 목적인 투명한 매개성에 대한 지향을 떠올리게 만든다. 가상 및 증강현실은 분명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세계 속에 존재하지만 보드리야르의 전언처럼 현실을 대리하고 보충하는 방식으로 기능하며 이러한 관계의 전복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두 개의 개념을 현실에 대한 해체적 기술로서 이해해야 한다. 언젠가는 투명해질 매개의 경험이 우리의 삶을 실체가 없는 실재계로 바꾸어놓기 전에 말이다.



Media Art Symposium <Data Fantasy> 발표/기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