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준의 문화/예술 비평

조문과 환대 : 무조건적 환대를 한 대통령은 왜 지탄받는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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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과 환대 : 무조건적 환대를 한 대통령은 왜 지탄받는가?

yoo8965 2014. 5. 5. 00:37


   우리 사회가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단계부터 흔들리고 있다.

   사회란. 일정한 경계가 설정된 영토에서 종교 ·가치관 ·규범 ·언어 ·문화 등을 상호 공유하고 특정한 제도와 조직을 형성하여 질서를 유지하고 성적 관계를 통하여 성원을 재생산하면서 존속하는 인간집단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앞서의 전제가 공유되지 못하고, [혹은 특정한 이들에게만 통용되고] 형성되어야 할 질서가 제도와 조직에 의해 헐거워졌다는 [제도와 조직이 질서를 파괴하는] 사실이다. 아무리 위법과 사고가 우리가 존속시켜야 할 법과 안전망을 공고히 해주는 역설적 작용으로 기능한다 하더라도 현실에서 그 도착 관계가 정도 이상으로 심해진다면, 그 법과 질서, 체계와 구조는 그 사회를 온전히 지탱하는 기반이 될 수 없다. 국민의 다수는 안정적이지 못한 국가의 기초시스템에 관한 회의를 품는다. 그러나 이 회의마저도 조작된다. 미디어는 사건의 진실을. 대중들의 관심을 필요에 따른 정보의 순열로 변화시킨다. 이른바 시뮬라르크에 의해 뒤덮힌 사회이다. 정치는 자연스럽게 가상적 특성에 의해 작동된다. 대표를 정해 자신의 의사를 내맡긴다는 간단한 가상적 원리가 복잡한 정치 시스템의 기저에 존재한다. 따라서 그러한 가상적 상이 우리의 의사를 반영하는 것이 옳겠지만, 애석하게도 가상은 현실과는 무관한 것이 되어버렸다. 오히려 가상에 의해 현실이 조작되는 사건이 매우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현재이다. 현실이 오히려 잠재적 가상이 되어버린 우리의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중심을 잡아야 할까.

   지난 29일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조문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대통령의 조문이 연출되었으며, 조작되었다는 보도가 뒤따랐다. 청화대는 현장에서의 섭외이며, 조문 조작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보도된 사진을 통해 조문객의 입장에 선 대통령과 노인이 서로를 위로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찍혀진 사진 한 장은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 그러나 조문이 조작된 것이건, 혹은 조작된 것이 아니건 간에 더 중요하게 인식되어야 할 사항은 그러한 상황에 대한 의심이 당연시 되는 작금의 상황이다. 상식적으로 당연해 보이는 일들조차도 의심이 요구되는 현실. 이 보다 더 지탄스러운 현실이 있을까.

   대통령은 뒤따르는 노인을 보고 당연히 유가족이라 생각하여 위로를 건내었다고 한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무조건적 환대를 행한 셈이다. 프랑스 철학자인 데리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번 조문에서 보인 대통령의 태도는 그 대상자의 신원을 묻지도 않고, 경호원을 통한 제지도 없는 상태에서, 그리고 타자의 영역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미루어 볼 때, 매우 적절한 행위였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의 주체가 한 국가의 수장이라는 점에서 이루어 진 점을 떠올려 보자면, 이러한 그녀의 환대는 매우 위험할 수 있다. 대통령은 국가의 최고의 통치권자이며 의사결정자이다. 그러한 직위에 있는 이의 조문은 의도와 목적을 떠나 큰 의미를 지닐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대통령의 조문은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할 수 밖에 없고, 조문의 대상에 대한 사전 파악 또한 행해져야 함이 사실이다. 요컨대, 대통령의 조문 그리고 환대는 조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대통령은 무조건적인 환대를 보여주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대통령의 조문에 관하여 조작이라고 판단하는 그리고 의심하는 행위는 이러한 인식에서부터 기인한 것이리라. 또한 지금까지 현 대통령이 보여준 행보는 현재의 민주적 현실과는 동떨어진 그것이었다. 특히, 개인사를 통해서도, 그것의 옳고 그르고를 떠나 과도한 경호의 모습들이 펼쳐졌었다. 때문에, 대통령의 이번 조문은 그녀의 역사와 일상을 벗어난다.

   이번 참사에 관한 정부의 대응을 두고 그 처리와 대응이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으로 이러한 반응이 나오는 이유는 이번 사건의 피해자 및 희생자들에 대한 정부의 태도이다. 이번 사태에서 유가족은 철저히 사고를 당한 대상으로서, 즉 타자로서 취급된다. 그러나 우리가 혹은 그들이 원하는 대응은 타자로서의 그것이 아니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특정 지역과 공간이라는 공통점으로 묶인 한정된 대상일지 모르지만, 그들은 우리와 과거와 미래를 공유하는 같은 국민이라는 이유로 철저한 타자가 될 수 없다. 국민들이 이번 참사를 보며 매우 큰 공분과 공감을 표시하는 이유는, 그들의 모습이 과거의 혹은 미래의 스스로의 모습으로 투영되기 때문이다. 즉, 이번 사태의 대상은 타자로서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그에 따른 수습 과정과 처우 및 응대의 기본도 이러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대통령과 정부 부처 기관들의 수장들은 수차례 이번 참사에 관한 그들의 입장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 어디에서도 희생자-유가족-일반국민-정부부처-대통령을 연결하는 주체로서의 고리가 보이지 않는다. 흔히들 요즘 유행하는 ‘유체이탈 화법’이란 이러한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행위의 주체로서의 입장을 벗어나 관찰자로서 스스로를 위치시키고, 마땅히 주체로서 취급받아야 할 국민의 일부를 특정한 타자로서, 이방인으로서 산정하는 그들의 방식. 그것이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이고, 개탄스러운 현재의 상황이며, 개선해야할 우리의 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