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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준의 문화/예술 비평
현대적 패러다임 : 게임, 시뮬라크르를 말하다 본문
1. 21C, 현재의 상황
'환상진동(幻想振動) 증후군(Phantom Vibration Syndrome)'이란 것이 있다. 주로
바쁜 현대인들에게 습관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의 하나인데, 전화가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휴대폰 진동벨이
울린다고 지각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이 증후군은 과도하게 기술 매개된 우리의 환경에서 종종 발생한다. 분석해보자면 '진동'은
실재하지 않지만 진동을 느끼는 감각 현상은 실재하는 셈인데, 미디어에 둘러쌓여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떠올려보면 이러한 현대병?도 나타날 법한 상황이다. 과학
기술과 결합한 새로운 기술-미디어는 우리의 생활 속에 깊숙히 침투하여 갈수록 그 의존도를 높여가게 만들고
있으며 이미 현대인들의 대부분은 컴퓨터와 휴대폰이 없는 삶은 생각하기도 힘들 정도로 심각한 미디어 의존증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과거엔 상상하기 힘든 환상적인 그러나 가상적인 현실 또한 만들어낸다. 휴대폰을 통해 멀리 떨어진 가족들과 얼굴을 마주하며 화상 통화를 한다던지, 실시간으로
컴퓨터를 통해 직장이 아닌 집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상황들 말이다. 더 이상 가상 현실은 SF 영화 속에만 등장하는 환상적 장면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일종의 실재하는 현실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가상(假象, Schein, Virtual)'이라는 형용사를 실재하지 않는 무엇 혹은 특정 상황 등을 설명할 때 사용하거나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재현해보는 '모의실험(Simulation)'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상 개념의 일상적 활용은 현실과의 일정 거리를 전제한다. 즉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미래에 일어날 수 있으며 실재하지 않는 무언가'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G.Deleuze)의 시뮬라크르(simulacre) 개념과도 연결되는데, 프랑스어로 시늉, 흉내, 모의(模擬) 등의 뜻을 지닌 시뮬라크르는 가상, 거짓 그림 등의 뜻을 가진 라틴어 시뮬라크룸(simulacrum)에서 유래한 말로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으나 생생히 인식되는 복제물을 가리킨다. 앞서 언급한 상황들은 분명히 실제로 존재한다. 따라서 현재 상황에서의 시뮬라크르는 현실의 존재 여부만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없으며 현실에서 혹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철학적 물음을 남기게 된다.
2. 시뮬라크르로서의 이미지
시뮬라크르 개념은 본질적으로 '원본'과 '복제'의 개념을 전제한다. 들뢰즈의 시뮬라크르 개념은 서구 기독교 세계의 사고방식을 확립한 플라톤의 모델을 기초로 하는데, 현실 세계를 복제물로 보는 플라톤의 개념(원본을 이데아, 현실은 복제)으로부터 복제한 현실의 또 다른 복제물로서의 개념을 더한 것이다. 이러한 원본과 복제물, 그리고 2차적 복제물의 도식은 시각 예술의 흐름에서 보자면 매우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과거 시각 예술은 원본(현실세계)의 복제물(이미지)로서 존재했다. 시대를 달리하며 다양한 흐름들이 제시되었지만, 결국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 혹은 어떻게 모방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이미지는 결국 현실의 복제물이었고, 예술은 그러한 복제 혹은 모방의 대리자였을 뿐이다. 그러나 사진이 등장한 이후 시각 예술의 역사에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다. 보이는 그대로의 현실 반영은 더 이상 예술에 있어 중요한 화두가 아니었고, 주체의 모습을 본딴 이미지가 아닌 주체의 본질을 분석한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인상주의나 입체파를 생각해보라) 또한 흥미로운 지점 또한 발생하였다. 사진기의 발명 이후, 회화가 현실의 1차적 복제물이라는 지위에서 벗어나 복제 자체보다는 다른 차원의 모색을 시도했다면, 하이퍼리얼리즘 회화는 사진보다 정밀한 현실에 대한 1차적 복제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하이퍼리얼리즘이 묘사하는 현실은 우리가 마주하는 진짜 현실이 아니다. 하이퍼리얼리즘은 오히려 현실보다 강력한 이미지를 관객에게 선사하여 현실을 넘어선 이미지를 실제라고 믿게 만든다. 가령 하이퍼리얼리즘의 대표화가인 리차드 에스티스(Richard Estes)의 1972년작 <Paris Street Scene>를 살펴보자. 오른쪽 거울 속에 실제 거리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사진처럼' 보이는 이미지는 사진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현실의 모습을 묘사한다. 거울 속에 반영된 풍경 이미지는 반쯤은 허상이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광경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이러한 이미지를 '사진같다'라고 평하며 시뮬라크르로서의 지위를 부여한다.
Richard Estes, <Paris Street Scene>, 1972
그러나 더욱 극적인 상황은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결합한 디지털 이미지에서 나타난다. 하이퍼 리얼리즘 회화가 의도적으로 실제하는 현실을 넘어선 이미지를 선보였다 하더라도 결국 이미지 자체는 본질적으로 현실에서 파생된 '어떤 것'이었다. 그러나 디지털 이미지는 태생적으로 가상적 존재 기반을 가진다. 즉, 디지털 이미지는 근본적으로 '어떤 것'에 관한 이미지가 아니며 따라서 어떠한 것에 관한 모사/모방 이미지 혹은 시뮬라크르가 아닐 수 있다. 가상 이미지는 근본적으로 현실의 어떠한 것을 대체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디지털 이미지는 이러한 공식에서 탈피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 이미지로 만들어진 가상 세계는 현실과의 관계 설정이 필요없다.
3. 매개와 재매개, 이미지 세계로서의 게임
<Pong>이 스크린 샷, 1972
게임은 기본적으로 현실 세계와의 관계 설정이 필요없는 디지털-이미지-세계이다. 물론, '필요없다'라는 것이지 '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게임은 현실의 여러가지 상황과 이미지를 활용한다. 다만, 게임은 현실의 복제물로서 현실과 유사해야 한다라는 명제에서 자유롭다. 이러한 사항은 기술적으로 현실적 묘사가 불가능했던 비디오 게임의 초기 역사에서도 드러난다. 퐁(Pong)이나 인베이더(Invader)와 같은 초창기 비디오 게임을 떠올려보자. 탁구공과 라켓을 형상화한 흰색 도트와 바 형태로 구현한 퐁은 단순한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또한 우주 침략자에 맞서 지구를 수호하는 비행기를 조종해야 하는 인베이더는 비행기의 형상을 간단한 도트 그래픽으로 연출했다. 이 같은 게임들은 단순한 형태이지만 상징적으로 현실 세계를 은유했다. 그러나 1980년 발표된 팩맨(Pacman)은 현실을 모방하지 않은 추상적 게임 캐릭터로도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비디오 게임의 역사는 게임에 있어 현실 세계는 강력한 리퍼런스이지만 필수 전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Max Payne 3>의 스크린샷, 2011
그러나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발전되면서 게임은 현실적 요소들을 차용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그래픽 성능으로 현실 세계와 유사한 게임 속 현실을 창조한 것이다. 최근 등장하는 비디오 게임들을 보면 마치 영화와 같은 영상과 게임 속 풍경을 보여준다. 2001년 처음 등장한 <맥스 폐인(Max Payne)>은 현재 시리즈의 3탄까지 나온 3인칭 슈팅 게임인데, 첫 편이 등장했을 때부터 필름 누아르 형식의 스타일로 유명해진 게임이다. (2008년에는 동명의 영화까지 제작되었는데, 게임 시리즈에 못미치는 인기로 혹평을 받기도 했다.) 이 게임은 상당히 현실같은 그래픽을 선보인다. 그러나 게임이 묘사하는 현실은 실제 현실이라기 보다는 영화적 현실이다. 물론, 영화라는 매체 형식 또한 실제의 삶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에 현실 세계라는 리퍼런스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게임이 묘사하는 현실은 현실 자체라기보다는 우리가 현실이라고 인식하는, 다양한 매체 속에 등장하는 현실의 상징적 복제 이미지이다.
4. 게임, 현실을 넘어선 시뮬라크르
현실을 강력하게 매개하는 매체들은 저마다의 리얼리티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게임은 다른 매체에 의한 리얼리즘 보다 더 하이퍼리얼(Hyper-Real)하다. 왜냐하면 영화나 다른 매체와 달리 게임은 하나의 또 다른 삶의 플랫폼으로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린든 랩(Linden LAB)의 3D 온라인게임인 <새컨드 라이프>는 게임이 지닌 새로운 가능성을 잘 보여주었던 사례이다. 제목처럼 ‘제 2의 인생(Second Life)’을 온라인 가상 커뮤니티를 통해 체험하게 하려는 의도를 지닌 이 게임은 다른 여타의 게임처럼 달성해야 할 뚜렷한 목적을 지니고 있지 않다. 대신 그 속에서는 실제의 삶과 마찬가지로 모든 활동들이 발생한다. 플레이어는 가상공간 속에서 또 다른 자아(Avatar)를 설정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다양한 활동들을 실행한다. 이 게임은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새로운 환경이자 인터페이스가 된다. 게임이 지닌 하이퍼리얼리티는 다른 맥락으로도 발견된다. EA스포츠의 피파온라인(FIFA Online)이나 세가(Sega)의 풋볼매니저(Football Manager)와 같은 게임은 실제 축구 게임과 선수를 모델로 만들어진다. 플레이어는 실제 구단과 선수를 선택하여 게임을 플레이하게 되는데, 실제 선수들의 능력치를 고려하여 전술을 짜거나 실제 스포츠 경기처럼 선수들을 트레이드하거나 영입하여 팀의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과거와 달리 실제 축구라는 스포츠 게임이 아닌 경영-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 가깝다는 점인데, 이러한 점 때문에 게임에서는 종종 실제 선수들의 능력치를 가지고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이와 같은 게임들은 플레이어들에게 게임을 하나의 오락거리를 넘어 현실과는 다른 삶의 플랫폼으로서 인식하게 만든다.
<Football Manager 2012>의 스크린 샷, 2012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의 저자 아즈마 하로키는 게임이 지닌 리얼리티에 관하여 “이야기를 복수화하고 캐릭터의 삶을 복수화하며 죽음을 리셋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만화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의 중심 과제, 즉 ‘캐릭터에 피가 흐르게 하는 것의 의미’를 해체시켜 버린다.” 라고 언급하는데, 리셋(Reset) 현상과 같은 사회 현상은 이와같은 게임적 리얼리티가 만들어낸 현실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례는 종종 게임이 제공하는 부작용으로서 빈번하게 등장하지만, 보다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점점 더 현실세계와 가상세계 간의 간극이 좁아지고 있으며, 현실과 게임이 지녔던 영향력의 상관 관계가 점점 더 역전되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영토는 더 이상 지도에 선행하거나, 지도가 소멸된 이후까지 존속하지 않는다. 이제는 지도가 영토에 선행하고 심지어 영토를 만들어 낸다.” 라고 말하며 가상에 의해 지배받는 현실을 예견했다. 즉, 현실의 복제물인 지도가 원본인 영토를 반영하는 이미지를 벗어나 현실을 변화시키는 무엇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게임 속의 가상 세계는 현실을 강력하게 참조한다. 그러나 이제까지와 같이 참조하는 것으로만 만족하지는 않는다. 이제 게임은 현실을 변화시킨다. 현실을 넘어선 강력한 시뮬라크르로서 말이다.
월간 아티클(Article) 2012년 7월호 기고글